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
24년 8월 8일 한국에서 미국으로 출발하는 인천공항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모님과 아내 그리고 가족들의 배웅을 뒤로하며 기대와 두려움 반반씩 한 가득 끌어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나는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아내를 위해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은 채 설렘과 즐거운 마음만을 표현하며 꿋꿋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막연한 기대감
아내는 미국의 동부 주립대학교 박사 학위를 취득하러 5년간 미국에 머물 수 있는 공식적인 학생이다. 그리고 박사로 온 만큼 대학교 내에서 TA/RA 등의 일정 부분 일을 하면서 학비는 면제 그리고 생활비 명목으로 일부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아내의 이런 노력과 능력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의 나의 직장과 커리어를 모두 내려놓고 미국이라는 새로운 곳에서 아내를 지원하는 결정을 하였다. 사실 커리어라고 해봐야 별거 없는 직장인이지만 나름 회사 내에서 인정받으며 월급과 부업으로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미국행은 단순한 결정이 아닌 미래에 대한 도전이었고, 직장인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향한 첫 걸음이었다. 그리고 난 탄탄대로를 걷기만을 바라면서 힘차게 3월에 퇴사를 하고, 호기롭게 미국으로 가기 전 가족들과 즐거운 여행과 휴식을 가지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민가방 4개와 기내용 캐리어 2개, 백팩, 그리고 몇개의 짐을 가지고 미국에 도착한 후 미리 계약해둔 집으로 향하는 길이 그리도 설레고 즐거울 수 없었다. 긴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내와 함께 만들어갈 미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너무나 즐겁고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기대감과는 먼 F2비자를 가진 외국인 한 남자 생물체였을 뿐이다.
미국에서 뭐하세요?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자기 소개를 하면 가장 많이 질문하는 것 중에 하나가 "미국에서 뭐하세요?"였다. 그러면 나는 처음에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에게 "아내가 박사 과정으로 와서 저는 그냥 따라왔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아..그러시구나..대단하시네요"라는 말로 대화가 끝났다. 살짝 기분이 묘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10명에게 이런 말을 되풀이 했을 때 쯤인가. 내 마음 한 구석에 버티고 있던 꿋꿋함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남자들은 대부분 일을 하고 있었고, 내 나이와 비슷한 분들도 교수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종의 고정 관념같은게 있었다. 남자가 보통 박사하러 오면 아내가 따라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내를 따라 직장을 그만두고 온 남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아내랑 같이 왔다고하면 당연히 내가 공부하러 온 사람인줄 알고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말을 이어나가기 애매해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점점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상황을 설명하다보니 내 자존감과 자존심에 조금씩 스크래치가 나는게 느껴졌다. "대단하긴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내가 사람들이 보기에 찌질해 보이진 않을까. 아니면 이 5년이란 시간 뒤에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아내는 교수가 되면 그때 나의 이 시간은 완전 버린 시간이 되고 되돌릴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계속 끊임 없이 맴돌았다. 그리고 F2비자가 왜 사람들 사이에서 시체비자라고 하는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비자발적 불효자
미국에 온지 3주가 지났을 무렵 부모님으로 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외할머니는 치매가 있었지만 분명 엄청 건강한 모습이셨다. 유일하게 제대로 기억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손자의 얼굴과 이름이었다. 손주 며느리가 항상 예쁘다며 아내에게 용돈으로 주신 베개 속 쌈지돈 3천원이 지금도 눈 앞에 아른 거린다. 미국으로 오기 바로 직전에도 웃으며 "할머니, 손자랑 며느리랑 미국 갔다가 올께! 1년만 기다리면 올거니까 건강히 계셔요!"하며 집을 나섰었다. 그 때 "어디가노? 안가면 안되나?"이 말이 왜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유학이든 이민이든 미국에 와서 지내는 사람들 대부분은 가슴 한켠에 부모님을 묻고 사는 것 같다. 나도 외아들이기 때문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돌볼 수 있는 다른 형제 자매가 없다. 오직 아들 한명 뿐인데 아내와 함께 미국행을 결정했고, 성공해서 돌아갈 날을 고대하지만 사실 미국에 정착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도 한편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기신 부모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산다. 그리고 응원해주시고 보내주신 감사함도 항상 가지고 산다. 그렇게 어쩔 수 없는 비자발적 불효자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