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미국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F2를 스스로 선택했다.
2024년 3월 20일 나는 회사 인사팀 면담을 위해 작은 방에 들어가 이것저것 설명을 들으며 최종 사인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내는 박사생으로 오기 때문에 당연히 F1비자였고, 나는 그냥 따라서 올 것인가 아니면 미국에 다시 취업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해야 하는 고민이 있었다. 또는 나도 석사를 지원해서 학위를 취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F2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미국에 갈 준비를 하는 첫 시작은 당연히 미국 영사관 비자 인터뷰였다. 많은 유학생, 이민, 혹은 직장 때문에 미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꼭 찾아보는 것 중하나는 네이버 카페 '미준모'다. 이곳에서 비자 인터뷰에 대한 내용을 샅샅이 찾아보며 예상 질문지도 뽑아보고, 아내와 나는 우리가 미국 가는데 걸릴만한 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분석하면서 준비했다. 인터뷰 당일 광화문 미국 영사관 앞에 아침부터 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속에서 간절함으로 별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영사관 앞에 서류 중에 비자 거절이 되면 받는 그린레터를 손에 쥔 사람들을 보며 아내와 긴장감 속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 차례가 되어 영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소지품을 다 검사받고 위층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절차를 거치며 영어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영사 : 통역 필요한가요?
- 아내 :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이 대화 후 나에게 한마디 질문도 하지 않았고,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병풍처럼 멀뚱멀뚱 서 있다가 그렇게 인터뷰는 끝이 났고, 다행이라고 하기에도 허무하게 우리는 무사히 비자를 받게 되었다.
시체가 되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속하여지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남의 속도 모르는 어떤 사람들은 와이프가 돈 벌고 남편이 놀고먹으면 정말 좋은 시간이지 않겠냐는 말을 한다. 내가 언제든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저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다. 그리나 나는 미국에서 일 뿐만 아니라 내 이름으로 은행 계좌나 심지어 아내의 서류가 없으면 자동차 면허증을 따는 것도 불가능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내의 신분증명이 함께 따라다녀야 했고, 나는 매번 가방에 서류를 잔뜩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나 스스로 주변으로부터 뭔가 지워지고, 사라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터넷에 나와 같은 F2비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지 검색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단어가 있었다. F2비자로 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있는 시체'와 같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처음에는 웃기기도 했고, 재미있었다. 한국에서 항상 어딜 가든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나름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는데, 이렇게 철저하게 없는 취급 사람인 듯한 상황을 겪는다는 것도 신기했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어도 못하는 아시아 XY염색체를 가진 생물체가 F2로 아무것도 못하는 채로 집에만 있는다는 것은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나는 이 세상에 누군가 기억은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굳이 왜?
40대가 다가오면서 내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 전문직으로 변호사나 의사가 된 사람, 아니면 교수나 목사가 된 사람 등등 자신의 뚜렷한 삶의 방향을 가지고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정작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의 시간은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어느 순간 내 상사와 회사를 위한 시간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라는 계속되는 의문에 끝은 나를 시체보다 못한 삶을 살게 했다. 그리고 이럴 바에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자 했고, 그 선택은 잠시 멈추고 다시 나아가보는 것이었다. 미국의 F2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닌 내가 원해서 된 잠시 시체가 되어보는, 아니 다시 태어나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