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래도 도전한다.
지금 미국에서 우리 집안의 가장은 내가 아니라 아내다. 미국에서의 나는 아내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 채 하루를 버티고 있다.
겁이 많은 남자
나의 체격은 그리 작지 않다. 170이 넘는 키에 몸무게도 80kg이 넘는 체격으로 20대까지는 제법 운동도 많이 해서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다. 군대도 정상적으로 다녀왔으니 누가 봐도 한국의 보통 남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조금은 작은 키지만 결코 미국인들에 비해 왜소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튼튼하고 멀쩡한 나에게 숨기고 싶은 게 하나 있다면 나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겁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거짓된 행동을 밖으로 내보이는 경우가 있다. 애견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면 겁이 많은 강아지가 더 공격적으로 사람에게 덤비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면이 강한 사람은 두려움을 잘 이겨내기에 겉으로는 오히려 평온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나처럼 겁이 많은 사람은 겉은 강해 보이지만 속은 매우 연약한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겁이 많은 나는 인생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안정적이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취업을 예로 들자면 사실 내가 다녔던 회사가 그다지 내가 원하던 회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턴에서 정직원으로 한 번에 전환에 성공하기도 했고, 굳이 재취업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서 그냥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떠나지 않은 채 머물렀다. 직장을 그만두면 세상이 반으로 쪼개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직을 아예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이직을 준비한 것도 아니다. 그만큼 나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여자 뭐지?
아내는 나와는 다르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아주 부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내를 처음 만난 날 나에게 한 질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처음에 속으로 "이 여자 뭐지?"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아내는 나보다 6살이나 어리다. 이런 아내와 연애를 하면서도 나는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다.
아내는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종로에 한 치킨집에서 야구를 보는 중에 옆에 한 중년 부부가 우리가 참 좋아 보인다며 같이 맥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당황했지만 아내는 웃으며 그러자고 했고, 실컷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 후 나갈 때 그분들이 우리가 먹고 마신 것까지 계산하셨다. 나는 계속 어리둥절하게 있었지만 아내는 넙쭉 감사하다며 신나게 그분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내는 나오면서 나에게 "원래 나는 이런 일이 많아. 오빠도 익숙해질 거야~"라고 말했는데, 난 그때도 속으로 "이 여자 뭐지?"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가끔 이런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미국에서도 먹히네
우리가 미국에 오기로 한 것은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나는 겁이 많아서 미국에 오고는 싶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무작정 직장을 그만두고 오는 것도 성격상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동안은 포기하다 시피한 계획이었지만 '극강의 E'를 가진 아내를 만나게 되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아내는 결혼 전에 석사 과정에 있었고, 미국으로 가려면 박사로 지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이런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학부생 졸업 후 직장생활만 해서 유학 제도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다. 아내는 자기가 석사 졸업 논문이 없어서 한국에서 박사로 일단 논문을 쓰고 이걸로 미국 박사도 도전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일단 되든 안되든 미국에 갈 수 있다면 해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내의 의견을 따랐다.
얼마 안 가 아내는 한국의 S대의 박사 과정에 합격했다. 그리고 아내는 한국에서 논문을 쓰고 미국 학회도 참석할 정도로 인정받으며, 결국 미국의 나름 유명한 주립대의 박사로 합격해서 왔다. 심지어 지금 미국 박사과정 중에서도 나름 인정을 받는 것인지 지도 교수가 아내와 나를 따로 초대해서 밥을 먹자고 할 정도가 되었다. 남편으로써 나는 이런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움과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HOME DADDY(홈 대디)
미국에서 아내가 박사과정을 마칠 때쯤은 아마 5년 후가 될 것인데 그때의 나를 상상해보곤 한다. 지금의 나와 5년 후의 나를 비교하여서 그림을 그리려고 상상해 보았을 때 아무런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면 기분이 상당히 묘하다. 미국의 영주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동안의 모든 커리어가 멈추어져 있는 채 나이가 40대 중반이 되기에 어딘가에 취업을 하는 것도 어렵다.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막연한 기대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상에 불가하다. 이대로라면 가장 가능성 높은 나의 미래는 '홈 대디'다. 이것이 나는 가장 두렵다.
내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와 다르지 않을까 봐 가장 무섭다. 나는 지금 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발버둥을 치고 있다. 하지만 엄청나게 높은 벽으로 둘러쳐진 울타리 안에서 언젠간 이 벽이 허물어질 것을 막연하게 기대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간다. 매일 이곳의 아침은 상쾌하지만 아침의 상쾌함을 잊을 정도로 초라한 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내는 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나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난 채로 매일매일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두려움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내가 겁쟁이라서 그렇다. 겁쟁이인 나는 앞으로 잘 치고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