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입장. 단 1인당 보드게임 1개씩 필수 지참 요함.
내가 터를 잡은 곳은 고성 한 해변가에 있는 외딴 아파트. 도시처럼 몇 차, 몇 동 구분 필요 없이, 딱 건물 1채 1동으로만 이루어진 아담한 단지. 그 주변엔 당시 비수기를 맞아 조용한 펜션 몇 개와 이곳이 삶의 터전인 어민들의 주택가가 오밀조밀 자리 잡고 있다. 다 합쳐도 이전에 살던 도시의 아파트 단지보다 작은 마을 부지다. 추분이 지난 계절 오후 7시 어간부터는 컴컴하고 서늘한 바다 공기가 이 고요한 어촌 마을에 깔리기 시작하는데,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이 몇 집에서 개 짖는 소리만 컹컹-하고 울려 퍼진다.
아파트는 낡고 오래됐지만, 그만큼 사는 이도 많지 않아 조용하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만큼 사람들의 손도 많이 타긴 했는지, 그 때를 지우기 위해 입주하고 며칠을 쓸고 닦고 보수했는지 모른다. 빌트인 가전들은 작동시키면 기름때가 흘러나와서, 청소 전문 기사님들을 몇 번이나 모셔야 했을 정도. 인프라가 많은 속초와는 차로도 한참이 걸리고, 그나마 도보로 편도 20분 정도 걸리는 식당 몇 개와 작은 마트도 오후 7시면 서둘러 그들의 하루를 정리하곤 한다. 아파트 바로 앞에 자리한 편의점이 다행히 즉각적인 욕구와 위급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나름 도시 사람인 나는 속초의 인프라를 포기할 수 없어 집을 구할 때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갓 고성에 온 도시인에게 이곳은 실로 無와 같은 곳이기에… ‘그래도 한 번 보기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고성에 있는 이 집을 소개받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이전의 고민은 사라지고 이곳은 나의 집이 되었다. 첫 감상평을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현관을 열고 거실을 향해 걸어가는 걸음의 무대는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 위로 변한다. 새파랗게 찰랑거리는 수면 위를 발로 한 발짝씩 딛고 나아가면 마치 저 수평선 어딘가에 내가 서있다.
너무 거창한가? 하지만 바다와 맞닿아 있는 베란다에 앉아 캔맥주를 탁-하고 따면 그곳이 바로 해변의 가맥집이 되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면 마치 바다와 하늘 그 경계에 동동 떠 떠다니는 바다의 유랑민이 된 듯하다.
이 집에서 경험하는 바다의 아름다움은 수십 가지다. 날씨가 좋을 때도, 궂을 때도, 계절이 뜨거울 때도, 매섭게 추울 때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바다는 주변과 어울려지며 다양한 감상을 준다. 특히, 새벽 느지막한 시간이 되면 새빨간 얼굴을 빼꼼 들이밀며 컴컴했던 어촌 마을에 붉은 조명을 끼얹는 일출은 무척이나 강렬하다. 꼬끼오- 닭 우는소리는 붉은 일출에 깔리는 BGM 정도 된다.
이곳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신년은 혼자 보냈다. 새해 아침, 전날 마을 하나로마트에서 사 온 떡국떡을 물에 불리고 육수를 끓였다. 살짝 늦잠을 잔 탓에 초초하게 핸드폰 액정 위에 뜬 시간과 가스레인지를 번갈아 보며 부랴부랴 떡국을 준비했다. 어설픈 칼질에 모양새가 뒤죽박죽인 계란 지단과 나름 구색 맞추려 부셔 넣은 김가루까지. 그릇에 대충 퍼 담은 어쨌든 완성된 떡국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해가 기지개를 준비하면서 수평선 부근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보며, 제 손으로 처음 만들어본 떡국을 수저로 떠먹었다. 성인이 되고서는 처음 눈앞에서 보는 새해 일출이다. 31살로 넘어가는 나의 인생 두 번째 막의 해라고 생각하니, 내가 정말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지인들을 이곳에 초대했다. 이 시국인지라 단 세분만 무료입장. 집에 들어서며 놀라움과 부러움을 담은 표정의 그들에게 나는 ‘이것밖에 없어.’하고 겸손하게 대답할 뿐이다. (이때쯤엔 당신들이 사는 도시의 인프라를 부르짖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새해 아침, 전날 늦은 시간까지 회포를 푼 탓에 골골거리는 이들을 한 명씩 깨우며, 나는 또 떡국을 준비했다. 베란다에 일렬로 앉아 떡국을 먹으며 일출 사진을 찍는 지인들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혼자 맞는 새해보단 일출 명소를 소개하는 재미가 더 컸기에 내년 일출 명당 예약을 미리 받아야겠다. 물론 내년도 딱 세 분만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