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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기이한 물결의 미학적 불편함

《킬링 디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다음 작품 관람 전 마음 가짐

by Melvine

영화의 제목과 기본 구조가 그리스 신화에서 왔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란티모스는 그 신화를 현대 배경으로 옮겨온다. 심장외과 의사 스티븐 머피(콜린 퍼렐)는 과거 수술대에서 마틴(배리 키오건)의 아버지를 죽게 했고, 이제 마틴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스티븐 가족에게 저주를 내린다.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이지 않으면 나머지 모두가 죽게 되는 것이다.


원작 신화에서 이피게네이아는 막판에 사슴으로 대체되어 목숨을 건지지만, 영화의 결말은 훨씬 허무하고 잔혹하다. 스티븐은 결국 눈을 가리고 가족들 사이에서 무작위로 총을 쏜다. 운명 앞에서 인간의 선택이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란티모스는 신화의 구조를 빌려오되 그 어떤 구원이나 은총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정의와 희생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이미 많은 뛰어난 리뷰와 글을 통해 《킬링 디어》의 의미와 은유를 접할 수 있기에, 여기서 하나씩 뜯어보며 분석할 생각은 없다. 대신 내가 작품을 보면서 직접 느낀 부분에 대해 공부하고 공유하고자 한다. 이 글이 앞으로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을 관람하는 이들과 영화에 대한 시야를 함께 넓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첫 번째 킥: 카메라 무빙

《킬링 디어》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카메라 무빙이다. 도입부터 이상하게 느껴진 장면이 있었다. 스티븐과 동료가 수술 후 걸어 나오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정면 하단에 위치해 두 사람의 걸음을 원거리에서 바라보듯 찍고 있었다. 분명 대화 장면인데, 왜 얼굴 표정이나 대화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관찰하듯 보고 있는 걸까. 이외에도 높은 각도의 부감이나 과하게 낮은 로우 앵글 장면이 상당히 많다. 처음에는 '어떤 제3의 존재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음을 표현하려는 게 아닐까'라고 느꼈다. 영화 《유전》을 본 사람이라면 디오라마를 통해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관찰자의 시선을 표현한 촬영 방식이 떠오를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관련 기사와 인터뷰를 찾아봤다. 촬영감독 티미오스 바카타키스는 란티모스의 오랜 협력자로, 여러 작품을 함께해 왔다. 란티모스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자신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많이 움직인다고 밝혔다. 그는 '카메라가 거의 또 다른 존재(another entity)처럼 느껴지기를 원했다'라고 설명하며, 사전 제작 단계에서 '높은 각도나 매우 낮은 각도에서 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다니며, 아래나 위에서 기어 다니는 것'을 구상했다고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영화 전반에 걸쳐 누군가가 등장인물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을 심어준다.



바카타키스는 이 영화를 위해 10mm에서 17mm에 이르는 초광각 렌즈를 선택했다. 이 렌즈는 공간을 왜곡하고 넓게 펼쳐 보이게 하면서, 동시에 인물들을 프레임 안에서 작고 갇힌 존재처럼 보이게 만든다. 란티모스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높은 앵글과 낮은 앵글은 관객을 등장인물보다 높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일종의 신적인 시점을 부여한다. 이는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며, 그리스 비극에서 인간이 신의 의지 앞에 무력했던 것을 현대적 영상 언어로 구현한다.

예를 들어 마틴이 스티븐에게 무감각한 표정으로 가족의 병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읊어댈 때, 카메라는 인물들을 아래에서 줌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줌을 많이 사용하여 관객이 등장인물들과 정서적으로 연결되기보다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듯 응시하게 만든다. 이 방식이 영화의 차갑고 임상적인 분위기를 강화하며, 감정적 거리 두기를 통해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킬링 디어》에서 카메라는 단순한 기록 장치가 아니라 영화의 주제의식을 구현하는 핵심 도구로 기능한다. 심장 박동처럼 호흡하는 줌, 감시자의 시선을 암시하는 극단적 앵글, 인물들을 왜곡하고 고립시키는 광각 렌즈, 정서적 연결을 거부하는 카메라 움직임—이 모든 것이 '운명 앞에 무력한 인간'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두 번째 킥: 사운드

《킬링 디어》의 두 번째 킥은 사운드다. 영화 내내 사운드와 음악이 인상 깊어 관람 후에 음악감독과 곡들을 찾아봤다. 이렇게 자세히 사운드를 파고든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다. 보통은 인상 깊었던 OST 몇 곡을 찾아 듣는 수준에서 그쳤다면, 《킬링 디어》는 이상하리만큼 불쾌함을 심어준 사운드들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다.


《킬링 디어》의 사운드트랙은 바흐의 요한 수난곡, 슈베르트의 스타바트 마테르, 죄르지 리게티의 피아노 협주곡 등 종교적 클래식 음악으로 구성된다. 종교 음악을 기초로 삼은 것은 분위기 조성을 넘어 영화의 주제의식과 연결된다. 영화가 탐구하는 희생, 속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그리스 비극의 주제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란티모스는 이 음악들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또 다른 참여자'로 기능하게 하여,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에 또 다른 결을 입힌다.


《킬링 디어》는 20세기 실험적인 작곡가들의 음악도 적극 활용한다. 죄르지 리게티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 'Lento e deserto'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도 쓰인 곡으로, 불협화음적 특성이 초자연적 공포를 증폭시킨다. 러시아 작곡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의 어둡고 비틀린 아코디언 사운드는 영화에 또 다른 층위의 긴장감과 공포를 더한다. 이러한 현대 클래식 음악들은 조성 음악의 익숙함을 거부하며, 관객에게 청각적 불안감을 끊임없이 심어준다.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은 조니 번이 담당했다. 그는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 《더 페이버릿》, 《푸어 띵스》까지 모든 작품에 참여한 핵심 협력자다. 조니 번은 '사실성을 미묘한 수준에서 높이면 극적인 임팩트를 훨씬 더 얻을 수 있다. 그 사운드의 리얼리즘이 관객에게 훨씬 깊은 몰입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접근법은 화려한 음향 효과보다 현실적인 소리의 미세한 조작을 통해 불안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하고 끊긴다. 관객에게 불안감을 안긴 뒤 자연스러운 앰비언트 사운드로 거짓 안도감을 주는 방식이다. 사운드트랙이 불쑥 들어왔다가 뚝 끊어지며 관객을 흔든 뒤, 실제 세계의 소리로 거짓 편안함을 제공한다. 이러한 청각적 불연속성은 영화의 긴장감과 정확히 맞물린다.

음악이 없는 순간들도 음악이 있는 순간만큼 중요하다. 병원 복도의 윙윙거리는 형광등 소리, 수술실의 기계음, 교외 주택의 일상적 소리들—냉장고 소음, 시계 소리, 발소리—이 오히려 초자연적 공포를 강화한다. 침묵 속에서 들리는 사소한 소리들은 관객의 청각을 예민하게 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공포에 대한 긴장을 지속시킨다.


가장 기묘한 순간은 킴(래피 캐시디)이 마틴에게 엘리 굴딩의 팝송 'Burn'을 아카펠라로 부르는 장면이다. 순수해 보이는 십 대 소녀가 부르는 밝은 멜로디가 이미 드리워진 비극의 그림자와 대비되며, 란티모스 특유의 어두운 유머를 청각적으로 구현한다. 엘리 굴딩의 'How Long Will I Love You' 역시 삽입되어, 사랑과 헌신을 노래하는 가사가 가족의 해체라는 서사와 씁쓸한 대조를 이룬다.





란티모스는 관객에게 편안한 감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의 카메라와 사운드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질문하게 만들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킬링 디어》는 그리스 비극의 현대적 해석이자, 시청각적 형식 실험이며, 동시에 가족, 죄책감, 그리고 도덕적 책임에 대한 날카로운 탐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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