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거장을 만나게 한 영화 《세계의 주인》
최근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인 《세계의 주인》을 관람하고, 그 여운을 마음에만 담아 두기엔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어 늦은 밤 타이핑을 시작한다. 이 글을 누군가 읽고 단 한 명이라도 《세계의 주인》을 더 보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도입부의 쩝쩝거림부터 심상치 않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교우 관계와 교사와의 관계도 원만한 주인공 주인(서수빈 분)이는 귀엽게 남자친구와 쉬는 시간에 키스를 하지만, 다음 단계의 신체 접촉은 거부한다. 모든 면에서 꽤나 잘하는 주인이도 이성 관계에서는 약간 서툰 면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매달 주인이의 남자친구가 바뀌나 보다.
서사의 흐름상 밝은 학교생활과 가정환경을 가진 주인이에게 어떤 갈등이 다가올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느껴진다. 같은 지역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엄마(장혜진 분), 마술 연습을 열심히 하는 동생(이재희 분)과 함께 살고 있지만, 아빠는 같이 살지 않는다. 영화 초반, 아빠가 동생과는 연락하지만 주인이의 연락에는 답하지않고 떨어져 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동생이 주인에게 배달된 편지를 몰래 숨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복선을 깔아 둔다.
사건의 시작은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성범죄를 저지르고 복역했던 범죄자가 출소하여 주인이가 살고 있는 동네로 온다는 소식이다. 주인의 엄마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보육을 받고 있는 누리(박지윤 분)의 오빠 수호(김정식 분)는 어린 동생을 등원시키는 길에 성범죄자가 살 집을 바라보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수호는 행동에 나선다. 학교 방송반으로서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운동을 진행한다. 전교생이 서명운동에 동의 서명을 한 상황에서 주인이 한 명만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힌다. 이유는 수호가 작성한 서명운동 문서 안의 문구가 틀렸다는 것이다. 주인이가 틀렸다고 말한 문구는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과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왜 주인이는 그 문구가 틀렸다고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결국 주인이와 수호는 몸싸움까지 벌이며 갈등이 심화된다. 이 와중에 익명성에 숨은 누군가는 주인이의 학교 책상 서랍에 쪽지를 남긴다. 주인이의 세계를 궁금해하는 누군가다.
주인이가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봉사활동, 길게 이어지기 어려운 이성 관계, 동생이 숨겨 버리는 편지, 연락이 닿지 않는 아빠…. 주인이 안에 숨겨진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세계의 주인》은 우리가 많이 봐 왔던 성범죄와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 영화의 방식과 다른 길을 걷는다. 우리가 봐 온 성범죄 관련 영화는 말 그대로 피해자의 감정을 짓이겨 쥐어짜는 과정을 보여주며 대부분 관람객의 분노를 극대화시킨다. 또는 고발의 형태를 취하여 어둠 속에서 몇몇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의 서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주인이가 품고 있는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 《세계의 주인》은 과하지 않은 감정 표현과 속도로 접근한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미스터리들, 갈등과 여러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영화 깊은 곳에 담긴 주제를 관객들이 여유 있게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풀어 간다.
누구 마음대로 피해자들의 영혼이 파괴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상처를 평생 씻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 뜻을 정교하게 고등학생들의 평범한 생활 안에서 평범한 대사들로 다듬어 관객에게 흡수시킨다. 오랜 시간 각본을 다듬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섬세함과 무의미한 장면이 없는 연출력은 한국 영화의 새로운 거장을 만나게 한다.
등장인물 각각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도 외모나 말투로 단순히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삶과 생각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을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해 죄책감에 주차장에서 몰래 술을 마시지만 세차장에서 딸의 감정을 씻어 주려는 엄마, 가해자로부터 오는 편지를 어떻게든 막고 가족의 걱정을 사라지게 하고 싶어 마술을 배우는 동생, 감정이 욱하지만 누구보다 주인이의 세계를 이해하는 미도(고민시 분), 재판까지 방청하며 가족보다 더 서로를 감싸 주는 봉사활동 참여자들, 함부로 타인의 슬픔과 기억을 페인트칠하지 않겠다는 태권도 관장.
이 인물들이 주인이를 둘러싸고 있는 주인의 세계다. 이런 세계를 구축하여 멋진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주인이는 영혼이 파괴되지도 않았고, 이미 상처를 씻어 낸 것이 아닐까?
여러 번 주인이의 진심을 꼬집으며 질문을 던지는 누군가. 그 누군가가 남긴 쪽지는 한편으로 관객이 가질 의구심을 정리해 연출자가 남긴 형태라고 보인다.
주인이가 아프지만 말하지 않던 누리에게 했던 꼬집기, "이래도 안 아파?"는 정작 아프지만 말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자, 단순히 성범죄 피해자에게만이 아니라 아픔을 덮고 숨기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래도 안 아파?
- 극 중 주인 -
쪽지를 남기던 그 누군가가 밝혀진다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친구들의 목소리로 쪽지를 읽으며 익명성을 강조하면서, 아직도 자신의 아픔을 아프다 말하지 못하는 이들을 이해하며 마무리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얼마나 칭찬해야 충분할까 싶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