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친구와 오랜친구

by 문주성

궁에서 만남 친구


여행 둘째 날, 오후 3시쯤이었을까.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창덕궁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고궁은 늘 그러하듯 시간의 흐름과는 다른 리듬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담장 너머로 길게 뻗은 소나무 그림자와 고요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오늘 이곳에서 처음 만날 사람이 있었다. 같은 캐나다 땅에 살면서도 한 번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 그는 캘거리에 살았고, 나는 에드먼턴에 있었다. 몇 번의 메시지와 짧은 전화가 전부였던 우리. 한국에서, 그것도 창덕궁에서 그와 마주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는 내 권유로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었다. 설렘이란 원래 그런 걸까. 낯선 사람을 기다리는 순간이 마치 환희처럼 느껴졌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누군가 내 시야를 스쳤다.

훤칠한 키에 깔끔한 옷차림.

‘설마 저 사람이?’

TV 화면에서 본 듯한 인상이었다.

‘아닐 거야.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용접을 한다고?’

스스로 피식 웃으며 내 직업을 괜히 비하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잘생긴 사람이 용접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어디 있나. 오히려 그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그가 브랜든이었다. 호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고, 연상의 아내와 함께 캐나다로 이주해 삶을 일궈온 사람. 지금은 치아 보정 기구를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던 길과는 조금 다른 현실에 서 있었다. 그래도 그는 웃으며 말하곤 했다. "그래도 잘 살고 있다고."


그런 그에게 내 글은 작은 위안이었을까. 우리는 몇 달 동안 연락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리고 오늘, 그는 한국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온 참이었다.


창덕궁은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었다.

10년 전, 무역회사를 운영할 때 일본 기술자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나는 늘 이곳과 경복궁, 그리고 충무로 필동에 위치한 한국의 집으로 안내했다.

일본어 통역 가이드 자격증도 있었고,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궁궐 구석구석을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야속하게도 대부분 잊어버렸다.

그래도 뭐 어떤가. 좋은 사람과 좋은 곳에서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더 소중한 순간이었다.


“궁은 처음이에요.”

그가 말했다.

처음이라고 하기엔 그의 품격이 묘하게 이 공간과 어울렸다. 비원에 앉아 오래도록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요한 정자 아래서 마주 앉은 우리는 삶의 전환점과 고민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런 시간들은 특별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편안했다.


궁을 나와 인사동 거리로 향했다. 골목 사이로 흘러나오는 국악 소리와 한지 공방의 향이 바람에 섞여 있었다. 낙원상가 근처, 노란 간판이 걸린 작은 커피숍에 들어가 다시 깊은 대화를 이어갔다.


조금 더 시간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평택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는 광명에 사는 친구와의 저녁 약속이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만원인 전동차 안에서 서로의 손잡이를 잡고, 눈인사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어색하지만 따뜻한 이별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는 모색하던 일을 멈추고 이제 은행 쪽 일을 하면서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형 은퇴하면 제게 맡겨요. 자산 관리 확실하게 해 줄게.”

농담 같지만 진지하게 건넨 말이 어쩐지 믿음직스러웠다.


인터넷으로 이어진 인연이 이제는 익숙한 시대지만, 창덕궁에서의 첫 만남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선명하다.

고요한 고궁의 담장 아래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온 두 사람이 조용히 미래를 이야기했던 그날 오후 3시.

그 후 다시 만나진 못했지만, 우리는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인연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가고, 그런 순간들이 삶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친구와의 재회


친구의 말대로, 나는 석수역에서 내렸다. 마을버스를 타고 10분이면 기아자동차 후문에 도착할 수 있다는 그의 안내를 믿고, 약속 시간인 5시 30분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 밖으로 나오자 예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역 앞의 분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작은 동네 버스 정류장 같은 분위기가 낯설었다.


기다리던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택시를 잡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결국, 근처 문방구에 들어가 길을 물었지만 퇴근 시간이라 이동이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유심 문제로 인해 전화도 불통 상태였다. 조퇴까지 하면서 나를 기다릴 친구를 생각하니 조바심이 났다.


시간은 흘러갔고, 여행가방을 멘 채 여기저기 분주히 움직였지만 여전히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 한 대를 발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사정을 설명하며 기아자동차 후문까지 가달라고 부탁했지만, 퇴근 시간이라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마지막 수단으로 ‘따블’을 불러서야 겨우 택시에 탈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깨달았다. 사람들이 주로 내리는 방향과 반대편 출구로 나오는 바람에 택시도, 버스도 잡기 어려웠던 것이다. 예상보다 거리는 훨씬 멀었고, 친구를 기다리게 했다는 죄책감에 더욱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도착한 곳. 멀리서 친구가 긴 목을 빼고 이리저리 지나가는 택시를 확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미안함과 동시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친구를 마주하는 그 순간, 마치 세상의 근심이 모두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동네 휴대폰 대리점에 들러 유심을 교체한 뒤, 고향의 큰형댁에도 전화를 걸어 인사를 드렸다.


"내가 너의 수호자라니까."


친구 장흠과 나는 무려 12년을 같은 학교에서 보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스스로 나의 수호자라며 나를 지키겠다고 말하곤 했다.


“내 색시니까 지켜야지.”


그가 그렇게 말하며 웃던 장면이 선명히 떠올랐다.


나는 어릴 때 꽤 곱상하게 생겼던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나를 늘 "내 색시"라 부르며 장난을 쳤다. 처음에는 마냥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정말로 나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또 다른 친구와 장난처럼 “누가 더 나와 가까운가”를 두고 다툰 적이 있었다. 별거 아닌 일로 다퉜던 그 시절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장흠은 노동리라는 동네에 살았는데, 우리 집 뒤편의 관불산을 돌아가야 하기에 거리는 족히 8km나 되었다. 하지만 명절이면 나는 형수의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그의 집을 찾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화통한 분이었고, 그분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여장부 같은 인상 깊은 분이었다.


30년째 기아자동차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는 퇴근 후 나를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조퇴를 했다.


함께 고향 선배가 운영하는 고깃집을 찾아 추억을 곱씹으며, 내 이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날 밤, 원래 시흥에 있는 누님 댁에서 묵을 계획이었지만, 친구는 강하게 만류했다.


“누나는 여행 중 며칠 더 볼 수 있지만, 나는 언제 다시 볼지 모르잖아.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그 말에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집으로 향했다.


늦은 밤, 술상이 차려졌고, 또 다른 고향 친구와 장흠의 회사 후배까지 합류했다. 술잔이 오가며 이야기가 깊어질 무렵, 후배가 장흠에게 물었다.


“형, 30년 동안 한 번도 조퇴한 적도 없다고 들었는데, 오늘이 처음 아니에요?”


그 말에 장흠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친구 보려고 처음으로 조퇴했네.”


그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30년 동안 지켜온 원칙을, 단 하루. 오직 나를 위해 내려놓았다는 것.


나는 과연 친구를 위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늘 말했던 **"내가 너의 수호자다"**라는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덧 재수 씨까지 합류했다. 문학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내가 쓰고 있는 수필과 나태주 시인 초빙 계획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정말요? 나태주 시인을 초빙할 계획이라니, 너무 멋지네요!”


그녀의 따뜻한 관심이 술기운보다 더 기분 좋았다.


친구가 즐기는 스쿠버 다이빙 이야기도 나왔지만, 나는 수영을 전혀 못하는 관계로 바로 패스.


언제 술자리가 끝났는지도 모르게, 그야말로 흠뻑 취한 밤이었다.


캐나다에서의 10년 이민 생활보다도 더 많은 술을 단 이틀 동안 마신 셈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해장국 한 그릇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짧지만 깊은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곧 또 보자, 나의 수호자.”


마지막 순간, 장흠은 내 택시비까지 대신 지불했다. 우버라 선결제 방식이었기에 나는 그를 말릴 수도 없었다.


택시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친구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 가라, 친구."

"곧 또 보자, 나의 수호자."


멀리서도 나를 응원해 주는 친구.

고맙고, 또 감사하다.

나는 이런 친구가 있어 참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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