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넷째 날
이날은 셋째 형님의 환갑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환갑 당일은 아니었다. 멀리 캐나다에서 돌아온 막내 동생인 나의 일정에 맞춰 조금 앞당긴, 육십한 번째 생일이었다.
아침 일찍, 매형과 누나, 그리고 나는 고향인 공주 유구로 향했다. 그곳엔 여전히 큰누님, 큰 형님, 작은 형님이 살고 계셨고, 부모님의 묘소도 그 자리에 있었다. 먼저 묘소에 들러 조용히 마음을 전한 뒤, 본격적인 환갑잔치가 열리는 공주 시내로 발길을 옮겼다.
솔직히 말해, 요즘의 환갑은 '잔치'라는 말보다 '가족 모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청년 같은 형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삶의 연륜이란 그저 숫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팔 남매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사회 분위기와 학교의 시선이 그랬다. 새 학년이 되면 선생님은 가정의 식구 수를 묻곤 했다. 네 명, 다섯 명… 그 정도가 평균이었다. 드물게 열 명이 넘는 집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형제가 많으면 ‘미개하다’,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런 말들이 어린 내게는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이 울음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이 시대에, 나는 그 시절의 우리 집이야말로 진정 풍요롭고 복된 가정이었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우리 팔 남매는 유구 읍내에서 화목하기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처음 보는 이들도 “나는 당신네 집 아홉째요, 열째요”라며 웃고 인사하던 기억이 난다. 형제간에 연락이 끊겼다거나 다툼이 잦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한가 싶을 정도다.
공주의 한 멋들어진 기와집 식당. 그 넓은 뜨락에 팔 남매와 그 자녀들이 모였다.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셋째 형님이었고, 병마를 이기고 잠시 외출한 작은누나와 먼 타국에서 돌아온 나는 조용한 조연이었다.
정갈한 음식과 따뜻한 말들이 오가는 식탁 위로, 세월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뜨락에서는 가족들이 돌아가며 단체사진을 찍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과연 이런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큰누님은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이고, 나 역시 멀리 떨어져 자주 올 수 없는 형편이니까.
이별은 언제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정원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카페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뒤, 작은누나는 요양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떠나는 차량을 바라보는 내 눈가가 시큰해졌다.
헛헛한 마음을 안고 큰 형님 댁에 잠시 들렀다가, 나는 관불산 자락에 있는 부모님의 묘소로 향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그곳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뛰놀던 산, 언덕, 오솔길… 변한 것은 오직 나 자신 뿐이었다.
중년이 되어 돌아본 고향은 어릴 적보다 작게 느껴졌지만, 그만큼 더 깊은 품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것도 ‘발전’되지 않은 그곳이 오히려 더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묘 앞에 오랫동안 앉아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여전히 맞장구를 쳐주고 계신 듯했고, 아버지는 묵묵히, 그러나 모든 걸 다 아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다시 찾아뵐게요. 천국에서도 건강하세요.”
그날, 그 뜨락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그것은 단지 가족의 한 장면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뿌리와 시간을 담은,
영원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일 또 한 사람의 인생을 마주하러 간다.
나태주 시인을 뵐 생각에,
마음은 조용히 설렘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