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섯째 날
약속보다 조금 이른 시간, 나는 공주의 풀꽃문학관을 찾았다.
이른 봄바람이 제민천을 따라 조용히 흐르고, 햇살은 오래된 일본식 가옥의 지붕을 따스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문학관 마당을 서성이며 나는 마치 시인의 내밀한 서랍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듯, 그곳을 천천히, 천천히 관찰했다.
벽에 걸린 시구마다 그의 삶과 사랑, 고독과 따뜻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고,
한 편 한 편의 시가 마치 풀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어느 날, 지금은 얼음꽃문학회 회장이신 김덕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미스터 문, 이 시 알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가 있냔 말이야.”
감격 어린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그러나 정작 그날의 나는 시인에게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문학회 총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막 맡았던 터라 마음이 어딘가 부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즈음 나는, 새로 이민 온 젊은 청년들과 가장들에게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주는 작은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놀라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게 됐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망생'을 말하고 있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자조적인 표현.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 마음 어딘가엔 희망이 아닌 허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생 선배로서 나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은 그들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문득 생각했다.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고, 마음 깊은 곳의 상처까지 다독일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야, 그날 들었던 시의 여운이 자꾸 입에 맴돌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상하게도 시인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구절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찾아낸 이름—나태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분이다. 내가 그토록 찾던 사람.
상처받은 젊은 영혼들을 위해, 문학회를 위해 꼭 초청해야 할 그분이었다.
시인은 막걸리에 은근히 취한 모습으로 서울 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오셨다.
점심을 겸해 인터뷰를 하신 듯했는데, 실내로 들어오신 시인은 곧바로 풍금 앞에 앉으셨다.
그리고는 ‘고향의 봄’을 연주하며 조용히 노래하셨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한 듯, 나는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이 잊고 지냈던 내 감각들을 하나씩 깨우고 있었다.
몇 곡의 연주를 뒤로하고 “선생님은,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시인의 첫마디와 함께 나와 시인, 그리고 기자의 어색한 인터뷰 아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대화가 끝난 후, 나는 조용히 준비해 간 시집을 내밀었다.
시인께서는 책 한 권 한 권에 정성스럽게 자신의 시와 서명을 담아주셨다.
그리고 멀리 캐나다에서 온 나에게, 여러 권의 책을 더 선물해 주셨다.
내 요청은 간단하고 간절했다.
“캐나다 에드먼턴에도 선생님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부디 그들에게도 오셔서,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겠습니까.”
시인은 조용히 웃으며 말씀하셨다.
“확답은 드리기 어렵지만, 1년 전쯤 미리 제안해 주시면 검토는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그날의 만남은 한 줄기 봄바람처럼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이듬해 시인은 캐나다를 방문해 주셨다.
그의 시와 미소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머물렀고,
그날의 내 작은 바람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현실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공주, 풀꽃문학관을 떠올린다.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풀꽃처럼, 시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작은 위로가 되고 있으리라 믿으며.
아래는 레츠고 에드먼턴에 나태주 북콘서트 후기를 남기신 분이 쓰신 내용.
5월 24일 나태주 시인을 만났다. 캐나다의 산골마을 같은 이 에드먼턴에 한국의 유명인사가 방문하여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자다가 떡을 얻어먹는 것과 같이 아주 흔하지 않은 일이다.
나태주 시인의 북콘서트를 가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전까지는, 그냥 심드렁했다는 것이 나의 본심이다. 시인이고 작가 고간에 나의 삶과 큰 관련 없는 이를 만난다고 해서 무슨 큰 감동이 있을까 해서였다. 만일 내가 진짜로 감명 깊게 읽은 책의 작가를 만나는 자리였다고 했다면 훨씬 더 설레는 마음으로 참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라니.. 시가 뭐.. 밥 먹여주나? 시가 뭐 1불이라도 내 경제력에 보탬을 주는 것은 아니지 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큰 붓으로 마침표 하나 떡 하고 찍어놓고 북콘서트에 참가하고 앉아있었다.
나태주 시인은 달변가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일 년에 200번의 강연을 하기 위해 한국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강연 횟수만큼 그의 대중 스피치 실력도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일 듯, 시인은 캐나다 듣보잡 산골마을 에드먼턴 한인들의 마음을 구수한 말솜씨로 살살 천천히 녹였다. 그리고 시인은 거의 5분에 한 번꼴로 사람들을 빵 터지게 만드는 유머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는 많이 소유하지 않는 삶을 지향하기에, 운전을 하지도 않고, 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로 인해 그의 부인께서는 불편한 삶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시기는 하지만, 시인은 불편한 삶이 불행한 삶이 아니라고 말하셨다. 그리고 나. 태. 주라는 이름으로 나 좀 태워 주세요라고 삼행시를 말하셨는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너무 웃겨서 뒤집어졌다.
시인은 80세이시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 소년과 같이 싱그러웠다. 웅장한 고목에 새 봄이 오면 여린 연두빛깔 새싹들이 올라오는 것처럼, 그는 어른으로써의 넉넉한 지혜와 아이의 청순한을 같이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순수함과 그의 시들은 캐나다 에드먼턴의 영하 40도의 추운 날씨로 인해 꽝꽝 얼어붙은 얼음이 4월의 봄바람에 보이지 않게 살살 녹듯이, 내 마음도 그렇게 녹여버렸다. 처음에 큰 붓으로 마침표를 찍고 콘서트에 참가했던 내 마음은 콘서트가 끝나자 어느새 큰 느낌표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나름 소싯적 초등학생이 시절에는 동시 좀 써본 나인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린 시절의 연습장에 빽빽이 써 내려갔던 초등학생맛 동시들과, 사랑에 빠진 20대 때 써 내려간 연애 시들도 내 기억으로 소환되었다. 먹고살기에 빡빡하고 어제가 오늘 같고 한 달이 일주일 같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40대의 나이지만, 시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잃어버린 청순함과 순수함을 조금은 되찾아 내 마음속에 살포시 자리를 만들어준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에드먼턴도 봄이 왔겠다, 내 마음에도 봄에게 자리를 주어야겠다. 연둣빛 어린 새싹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