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거리만큼

럭스텍 이야기 2

by 문주성

우리는 벌써 몇 시간째 오사카의 바닷가에 서 있었다. 초여름인데도 바닷바람은 제법 차가웠고, 말끝마다 서로의 숨결이 허공에 흩어졌다.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이 출장을 끝으로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고, 사직 의사도 통보한 상황이었다. 그에겐 마지막 설득의 기회였을 것이다. 당시 기술이사였던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렸든 최선을 다해 나를 붙잡고 싶어 했다.


“Mr. 문, 문 팀장도 알다시피 나는 꿈이 크잖아. 나는 매출 1조 원짜리 회사를 만들고 싶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회사를 만드는데 Mr. 문이 꼭 필요해.”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한 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거야. 나는 Mr. 문을 이용하고, Mr. 문도 나를 이용해서 성공하는 거지. 그게 인생 아니겠어?”


그 말이 유난히 귀에 박혔다. 아니, 거슬렸다. '돕는다'는 표현도 있었을 텐데, 굳이 '이용'이라니. 물론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회사는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사장과 부사장조차 그의 판단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그는 삼성 연구원 출신으로, 당시 한국에서 이 분야의 유일한 전문가로 통했다. 회사를 세운 이들은, 마치 프로야구 최고 연봉 선수라도 데려오듯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를 영입했다.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다. 특히 일본과 협업이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 앞에서는, 결국 나를 필요로 했다. 통역자이자 조율자였던 내가 없으면, 그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기술에 문외한이던 나조차도, 그의 질문이 때로는 지나치게 기초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런 것도 몰라?’ 싶은 순간. 일본 기술자들 앞에서 그가 면박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고, 나는 그런 상황을 수습하느라 애를 태웠다.


삼성이란 이름조차 조롱당하던 시절, 우리는 작은 회사를 대표해 그 냉소적인 시선을 견디며 싸워야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삼성조차 기술도, 이름값도, 예의도 없는 회사로 비아냥 받던 시절이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그는 철저했다. 보고서는 반드시 A4 한 장. 회의 준비는 새벽 4시까지도 불사. 치열함과 집요함, 그건 분명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열정은 점점 내게서 멀어졌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 열정으로부터 멀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꿈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 꿈이 점점 공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용’이라는 말에서, 그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슬쩍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고,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회사를 떠났다. 마지막 출장, 마지막 바다, 마지막 대화.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그리고 수년이 흘러, 그는 성공한 벤처기업 회장이 되어 대한민국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함께했다는 뉴스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솔직히 말하면, 부럽고, 비참했고, 질투심도 느꼈다. 나는 그 모든 감정을 순식간에 통과하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성공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내가 걸었던 길이 헛되지 않았다는 작은 위안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뿐이다. 누군가는 회의실에서, 누군가는 공장에서. 누군가는 말로 세상을 움직이고, 또 누군가는 손으로 세상을 지탱한다.


그를 향한 나의 감정은 지금도 뒤섞여 있다. 존경, 질투, 배움, 실망, 그리고… 고마움.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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