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스텍 이야기 6
통역, 그 이상이 되기 위하여
럭스텍이 개발하려는 광통신 부품은, 단순한 금속이나 플라스틱이 아니었다.
고온에서도 수축이나 뒤틀림이 거의 없는, 고강도 세라믹 소재.
완제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30개가 넘는 공정을 거쳐야 했고,
그 절반 이상의 핵심 장비는 일본에서만 제작 가능한 기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건 **‘동심도(同心度)’**였다.
두 개의 원이 완벽히 같은 중심을 공유해야 한다는 정밀의 미학.
허용 오차는 단 1 마이크로미터(μm).
머리카락 굵기의 백분의 일.
오차 하나가 모든 것을 망치는 세계였다.
처음엔 그저 놀라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워졌다.
> “럭스텍은 과연 이 수준을 따라갈 수 있을까?”
나는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였다.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기술과 사람, 문화를 잇는 다리가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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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당시엔 유튜브도, 조언자도 없었다.
길은 스스로 찾아야 했다.
일주일 뒤, 일본 오바타사와의 ‘동축가공기’ 미팅이 예정돼 있었다.
지난번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우왕좌왕할 수는 없었다.
밤을 새웠다.
기술 용어를 외우고, 일본 장비 관련 영상을 반복해서 보며
회의 흐름을 시뮬레이션했다.
머릿속으로 수십 번, 그날을 리허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회의는 무난히 끝났고, 나는 A4용지 25장 분량의 회의 기록과 기술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했다.
그동안 나에게서 늘 시선을 피하던 기술이사가 그 보고서를 받아 들고는 말했다.
> “수고했어.”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말은, 내 안에 오래 남았다.
그 순간, 나는 뭔가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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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그 시절의 애인
물론, 단 한 번의 회의와 보고서로 모든 불신이 사라지진 않았다.
회의가 있을 때마다 나는 또 나를 점검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 “시키는 일만 잘할 거였다면, 나를 왜 뽑았을까?”
그래서 결심했다.
행동으로 보여주자고.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전세방으로 이사를 했다.
주말도, 주일도 출근했다.
그 시절, 나에게 유일한 애인은 ‘일’이었고,
럭스텍은 그런 나에게 가장 좋은 연인이 되어주었다.
전임자가 짜놓은 일정표를 따라가는 단계는 끝났다.
이제는 기술이사와 함께 회의 계획을 만들고,
앞으로 만나게 될 일본 업체들과 직접 견적을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는 일도 나의 몫이 되었다.
퇴근 후엔 친구가 다니는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무역 업무도 배우기 시작했다.
럭스텍의 모회사는 포스코에 전량 납품하는 회사였기에
누구도 나에게 무역을 가르쳐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역협회를 찾아갔다.
관세 관련 서적을 사서 장차 들여올 기계의 관세율을 분석하고,
보다 낮은 관세율을 적용받기 위한 문서를 만들며,
처음 해보는 일을 스스로 깨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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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무대를 향해 걷다
생소했고, 막막했고, 때로는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이 일’의 진짜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럭스텍이라는 무대 위에, 나는 조용히 등장하고 있었다.
기술의 언어로, 노력의 말투로,
처음엔 통역자였던 내가,
이제는 프로젝트를 움직이는 한 축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