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 되다.

럭스텍 이야기 10

by 문주성

2달여에 걸친 일본 출장.

우리는 단순히 기계를 들여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해내야 할 하나의 숙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기계의 국산화.


기계 국산화는 종이에 그린 설계도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교한 설계를 손에 넣는다 해도,

그것을 구현할 인프라와 숙련된 기술,

무수한 시행착오 속에서 축적된 집단의 경험 없이는

기계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특히 정밀가공기계란, 그 자체가 한 세대의 기억이자, 역사의 농축물이다.

금속은 사출 된 뒤 수년간 야외에 방치되며 자연의 힘에 뒤틀린다.

그런 뒤, 비로소 가공의 테이블 위에 오른다.

한국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시대를 건너뛰려 하고 있었다.



---


작전명: 그림자


검수가 한창이던 어느 날 밤.

기술이사의 호출을 받았다. 설계과장, 동축가공기 담당자와 함께 그의 방으로 향했다.


잠시의 정적 끝에,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동축가공기는 반드시 국산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도면이 필요합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산업스파이.

그 단어가 뇌리를 때렸다.


회사를 위한 마음이야 누구보다 컸지만,

선을 넘는 일에는 주저함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작전은 짜여 있었다.

누군가는 유인하고, 누군가는 촬영하고,

누군가는 망을 서는 2인 1조의 그림자 작전.


점심시간, 후배가 오바타 측 담당자들을 밖으로 데려갔다.

식사와 갑작스러운 복통을 핑계 삼아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우리는 검수 현장의 문을 닫고 도면을 넘기기 시작했다.


300여 장, 아니 거의 400장에 달하는 도면.

한 장, 한 장.

셔터가 눌릴 때마다 손끝이 떨렸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고,

문이 열릴까 두려워 가슴이 철렁였다.


>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회사와 나라를 위한다고,

국산화라는 대의명분 아래,

정당하지 않은 수단을 취하고 있는 나 자신이

낯설고 서글펐다.


그날의 사진들은,

결국 동축가공기의 국산화를 이뤄냈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았고,

일정도 지연되지 않았다.

우리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나는 오바타의 담당자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 국산화된 기계를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무겁게 가라앉곤 했다.



---


설득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외교


동축가공기에 이어,

PC(곡률) 가공기의 국산화가 다음 과제로 주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도면은 종이에 인쇄되지 않았다.

암호화된 컴퓨터 시스템 안에만 존재했다.


우리는 전략을 바꿨다.

직접 설계자를 설득하기로.


후배는 통역 아르바이트로 일본에 온 학생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 책임감을 갖고 이 역할을 감당할 사람은,

처음부터 나뿐이었다.


검수 일정 중 그를 별도로 만나기 위해 퇴근 후

도쿄 신주쿠의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셨고,

이내 맥주 바로 자리를 옮겼다.


서로의 잔을 기울이며

직장인의 애환과 고단한 삶에 대해 나누었다.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나는 마침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우리 기술이사는 당신의 기술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하지만 가격의 현실적 문제로 인해

초기에는 귀사에서 기계를 구매하더라도,

우리는 장기적으로 국산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설계한 PC가공기의 도면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정면에서 던진 질문.

회사를 등지고 도면을 팔라는 제안.


나 역시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수없이 고민했고,

때로는 모욕을 감수할 각오도 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 “Why not.”




그리고 덧붙였다.


> “다른 기계 도면도 넘길 수 있어요.

원하면 말해 주세요.”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인간이 돈 앞에서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물론, 그가 거절할 수 없을 만큼의 돈을 제시한 것도 사실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거래의 공범이 되었다.



---


국산화의 빛과 그림자


우리는 결국, 국산화에 성공했다.

기계는 들어왔고, 기술은 내재화되었다.


그러나 그 성공은,

누군가의 침묵,

누군가의 타협,

누군가의 양심 위에 세워진 성과였다.


나는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그날 우리가 한 행동은, 정말로 옳았던가.


기술 독립이라는 거대한 대의명분이

한 인간의 양심을 짓밟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국산화된 기계가 아무리 자랑스럽다 해도,

그 속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공주는 누구의 딸이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