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스텍 이야기 11
일본 기계 검수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동경에서 시작해 사이타마, 나고야, 그리고 오사카 근교 마쓰모토까지. 두 달 가까운 여정이, 어느덧 마지막 장면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처음엔 열 명이 넘던 검수 인원이 점차 줄어들고, 마지막엔 센터리스 장비 검수팀 몇 명만이 남았다. 낯선 도시를 오가며 땀을 흘렸고, 서로 등을 맞대며 기계를 점검했다. 그 순간엔 몰랐지만, 훗날 그 시간들은 꽤 짙은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검수는 단순한 기술 점검이 아니었다. 언어와 문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았다. 출국 전, 나는 동료들에게 어떻게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지, 길을 잃었을 때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 종이 한 장에 일본어로 빼곡히 적어 건넸다. 작은 종이조각 하나가 그들에게는 가장 믿음직한 나침반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계획은 틀어졌고, 길은 어긋났고, 사람은 지쳤다. 매번 새로운 동료가 일본에 도착할 때마다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호텔 문을 열면 어김없이 반가운 얼굴이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냥 앱 켜고 구글 맵 쓰면 되잖아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1999년의 일이다. 아이폰도, 와이파이도 없던 시절. 전화 한 통조차 쉽지 않았고, 손 편지가 오히려 더 정확한 정보였던 때였다.
마지막 미션은 내게 주어졌다. 기계의 주원료인 세라믹 파우더를 사서 혼자 귀국하는 일. 나고야 인근의 공장을 찾아 직접 제품을 수령해야 했고, 나머지 동료들은 모두 귀국한 상태였다.
그 공장은 규모는 작았지만, 원하는 품질의 세라믹 파우더를 구할 수 있었다. 하얗고 고운 분말. 무게는 20킬로그램에 달했다. 트렁크에 넣고 나니 팔이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마지막 임무까지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이란, 마지막 장면조차 연습 없이 찾아오곤 한다.
나고야 공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티켓을 받은 뒤, 트렁크를 부치려는 순간—
갑자기 네 명의 일본 경찰이 다가와 나를 둘러쌌다.
잠시 후, 훈련받은 탐지견이 트렁크 주변을 킁킁거리며 맴돌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세라믹 파우더의 외형이, 누가 봐도 마약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순백의 가루는 고요하게 담겨 있었지만, 누군가의 눈엔 충분히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나는 곧 공항 안의 조사실로 이끌렸다.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가루의 성분 분석, 출처 확인, 서류 점검등 끊임없이 해명하고 또 해명했다.
한순간, 나는 상상 속의 뉴스 화면 속에 서 있었다.
“오늘 오후, 나고야 공항에서 한국인 남성이 마약 밀수 혐의로 체포되어…”
진땀이 흘렀다.
다행히 검사는 무사히 끝났고, 나는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예약한 비행기는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다음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한국 경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에서 문제가 없었다는 통보가 이미 왔지만, 한국 입국 절차상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나는 또다시 공항 내 조사실로 끌려갔다. 긴장이 풀린 몸은 더 무거워졌고, 새벽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백주대낮에 20킬로그램짜리 마약을 공항에 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실소 섞인 항변을 했지만, 이 사건 이후로 나의 여권에는 특별한 꼬리표가 달렸다.
그 후로도 일본에 100번 넘게 출장을 다녔지만, 그중 절반이 넘는 50번은 몸수색 대상자가 되었다. 공항의 보안요원 중 누군가는 나를 ‘흰 가루의 사나이’로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2개월간 이어진 일본 기계 검수는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검수가 끝난 장비들은 하나씩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고, 회사는 다음 단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웃음과 진땀, 실수와 감사,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다시, 얼마나 흥미로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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