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스텍 이야기 14
CLEO ’ 99를 기억하며
1999년 5월, 미국 볼티모어.
빛을 다루는 전 세계의 석학들과 기술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CLEO ’ 99.
그곳은 말 그대로 광(光)의 전당이었다.
나와 회사 동료는 일본에서 출발한 300명 규모의 방문단 일원으로 참석했다.
비록 내 명함에는 '영업사원'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나 자신이 미래 과학의 중심에 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전시장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새로운 기술, 혁신적인 부품, 전례 없는 가능성.
모든 것이 눈부셨다.
사람들의 눈빛은 광채로 가득했고, 열정은 마치 레이저처럼 날카롭고 뜨거웠다.
한국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광통신 기업들의 연구원들이 보였고,
일본에서 늘 잡지나 논문을 통해서만 접하던 석학들이
바로 눈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 아쉬웠다면 영어로 하고 있었다는 것
밤이 되면 무대는 또 다른 빛으로 바뀌었다.
SENKO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의 초청 만찬은
단순한 만남이 아닌, 연결과 교류, 가능성을 나누는 장이었다.
그중, SENKO가 주최한 어느 날 밤.
샴페인 잔을 들고 유럽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려는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문상 이시죠? 럭스텍에 계신...”
놀라웠다.
낯선 대륙, 낯선 얼굴에게 내 이름을 들은 순간,
낭만이 아니라 경외심이 밀려왔다.
그는 내가 다닌 대학과 전공,
그리고 럭스텍이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까지도 알고 있었다.
“놀라지 마세요. 저희는 사내 네트워크로 실시간 정보를 공유합니다.”
그 말은, 세계는 이미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마지막 이틀,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보스턴의 하버드와 워싱턴 D.C. 관광이라는 유혹이 있었다. 향후 영업에 필요한 충분한 명함도 확보했고 기술동향에 대한 책자도 확보해서 어찌 보면 더 머물지 않아도 될지 몰랐다.
남들도 회사의 업무를 수행하는 거지만 마지막 이 틀의 관광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전체 일정에 포함된 것이었다.
같이 간 일행과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었었다. 회사의 비싼 돈을 내고 출장을 온 것인데 과연 관광을 떠나도 좋은 것이냐...컨퍼런스 내부는 보물창고 같았다.
손만 대면 터질 것 같은
미래에 대한 갈망은 우리를 콘퍼런스 홀에 붙잡아 두었다.
조금이라도 더, 최신 기술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싶었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선택받았다.’
우리는 빛의 시대를 여는 사도들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도 눈부셨다.
우리는 미처 그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2000년을 정점으로 광통신 산업은 거대한 거품처럼 부풀었다가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너도나도 미래를 말하며 흥청거렸고,
시장은 들뜬 춤을 추었다.
그러다 돌연,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는, 타이타닉호에 탄 승객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찬란한 조명 아래에서 환호했지만,
거대한 빙산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컨퍼런스는
단지 기술의 축제가 아니었다.
그건 거대한 프롤로그였다.
빛의 시대가 오기 전,
인간의 욕망과 기대가 만든 아름답고 위태로운 서막.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눈부신 장면도,
그 뒤에 이어진 암흑과 재편의 시간도 함께 목격했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광통신은 무너졌지만, 기술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사람'을 보았다.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빛을 향한 열망은 하나였다.
컨퍼런스를 마치고 돌아온 날,
회사 책상 위에 쌓인 문서 더미들 속에서
놀라운 소식들을 발견했다.
그동안 샘플 테스트조차 미루던 회사들로부터
연이은 주문이 들어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건
SENKO에서 도착한 주문서였다.
무려 50억 원에 달하는 첫 오더.
마치 그날 밤, 낯선 대륙에서 건네받은 샴페인 잔처럼,
이 주문서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잘하고 있어. 이제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