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하루, 천년의 파문

by 문주성

나는 역사 덕후는 아니다.

그런데도 가끔, 역사의 책장을 넘기다 문득 멈춰 서게 되는 장면이 있다.

가장 침묵하던 이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움직이는 이야기.

그 중심에 ‘만력제’라는 황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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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萬曆帝).

명나라 제14대 황제. 48년의 재위 기간 중,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 속에 보냈다.

국정을 외면하고, 신하들의 상소를 무시하며, 스스로를 궁궐 깊숙이 가두었던 사람.

백성들은 그를 '존재감은 크지만 움직이지 않는 황제', '엄군(儼君)'이라 불렀다.


그리고 수백 년 뒤, 그 이름은 다시 한번 역사 속에서 불려졌다.

1960~70년대, 중국의 문화 대혁명.

마오쩌둥은 전통 질서와 봉건 유산을 철저히 부정했고, 만력제는 '부패한 구시대의 상징'으로 지목되었다.

그의 무덤은 홍위병들에 의해 파헤쳐졌고, 황제의 관은 땅 위로 끌려 나와 유골까지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는 중국 역사상, 황제의 무덤이 공식적으로 파괴된 첫 사례로 남았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걸까?


거의 모든 시간에는 그랬다.

하지만 단 하루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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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한양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조선의 임금은 백성을 뒤로한 채 북쪽으로 몸을 피했다.

절망 속에서 조선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북경으로 사신을 보냈다.

“살려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그날,

오랜 침묵을 지켜오던 황제가 움직였다.


“병력을 보내라.”


그 한마디가 칙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는 대동강을 건넜다.

이여송, 진린, 양호.

수만 명의 명나라 병사들이 조선을 밟았다.

그들과 함께 의병이 다시 일어났고, 이순신의 바다는 다시 불타올랐다.

조선은 무너졌지만, 끝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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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상상한다.

그날, 만약 황제가 침묵을 지켰다면?

그 단 한 번의 결단조차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이름의 나라에 살고 있을까?

한국어라는 언어는 지금처럼 존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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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결단은 단순한 ‘은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질서를 지켜낸, 명나라의 지정학적 본능이었다.


당시 동북아는 명을 중심으로 한 '화이질서(華夷秩序)' 아래 있었다.

조선은 그 체제의 일부로 자율적인 통치를 누렸고, 일본은 그 질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체제를 파괴하려 했다.

조선을 삼키고 대륙으로 진출해, 자신만의 신질서를 세우려 한 것이다.


조선이 무너졌다면, 명나라는 곧바로 일본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건 단지 한 나라의 붕괴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권력 구도가 일본 중심으로 재편될 수도 있었던 시나리오였다.


따라서 만력제의 파병은 감정적 판단이 아닌, 전략적 선택이었다.

조선을 지키는 일은 곧 명나라 국경을 지키는 일이었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는 지정학적 방어선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날의 결단은 화이질서의 마지막 방파제였다.”

“명나라의 국익을 지킨 외교사 최대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파문은 일본에도 미쳤다.

임진왜란의 실패로 도요토미 체제는 붕괴했고, 이후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는 쇄국정책을 선택했다.

대륙이 아니라 내정을 택한 일본.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말한다.

“그날, 동아시아 냉전이 조기 발발하는 것을 막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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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만력제는 결국 제국을 구하지 못했다.

그가 이끌던 명나라는 수십 년 뒤, 청나라에 의해 무너졌다.

그의 오랜 침묵은 결국 몰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단 하루.

그가 내린 그 한 마디만은 천 년의 파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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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끝난 뒤, 조선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만력제를 모신 사당이 여러 곳에 세워졌고,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정신은 병자호란 이후까지 이어졌다.

그 단 하루의 결단이, 조선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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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언제나 칼을 든 자에 의해 쓰이지 않는다.

때로는, 가장 고요한 이의 침묵 너머에서 태어난다.


황제였지만 아무것도 뜻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

황후의 그림자 속에서, 간신의 틈에서, 스스로를 숨기며 침묵으로 버텼던 사람.

그가 단 하루,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덕분에 이렇게 한국어로 이 글을 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땅에 태어나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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