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의 한 조각, 그리고 유학 시절의 질문

by 문주성

“문 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 경제의 규모가 일본의 어느 정도라고 보지?”


강의실은 조용했다. 일본어로 진행되던 경제 수업, 교수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자 잠시 말이 막혔다.


“글쎄요….”


그 대답에는 무지가 아니라 회피가 담겨 있었다. 숫자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수치를 입에 올리는 순간, 내 조국의 초라함을 내가 직접 확인해 주는 사람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교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제를 공부한다는 학생이 ‘글쎄요’라니. 실망이군.”


1997년, 일본 유학 시절의 한 장면이다. 당시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버블은 꺼졌다고 했지만, 그 여파조차 한국의 성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반면 한국은 외환위기를 앞두고 있었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 뒤에는 늘 불안이 따라다녔다.


강의실을 나서며 나는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힘이 없을까.’


그 질문은 학문적인 것이기보다 감정에 가까웠다. 조국의 경제 규모가 아니라, 일본 사회 속에서 외국인 유학생으로 살아가던 나 자신의 위치가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약한 나라에서 왔다는 자각은 어느새 나를 설명해야 하는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시간은 흘렀다.


지금 나는 캐나다 에드먼턴에 살고 있다. 알버타주의 주도이자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도시, 그중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동네로 꼽히는 윈드미어에서 요즘 아시안 축제가 열리고 있다.


처음에는 동네 주민들만 모이던 작은 행사였다. 그러나 3~4년 사이에 이 축제는 도시 전체가 인정하는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성장했다. 올해 프로그램을 훑어보던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여섯 개의 주요 무대 중 세 개가 한국 문화였다.

태권도, 사물놀이, 그리고 K-pop 댄스.


더 놀라운 장면은 무대 위에 있었다. 공연자 대부분이 한국인이 아니라 캐나다 현지인이었다. 특히 K-pop 댄스팀은 단 한 명의 한국인도 없이, 캐나다에서 자란 다양한 인종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국어 가사를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며, 익숙한 안무를 몸에 새긴 듯 춤추고 있었다.


캐나다 사회는 흔히 **‘문화 모자이크(Cultural Mosaic)’**라고 불린다. 여러 문화가 하나로 녹아 사라지는 미국식 ‘멜팅 팟’과 달리, 각자의 색과 무늬를 유지한 채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방식이다. 정체성을 지우지 않아도 공동체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 바탕에 있다.


윈드미어의 무대 앞에 서 있던 나는 문득 30년 전 일본의 강의실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질문 앞에서 침묵했고, 조국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내 조국의 문화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이미 타인의 몸과 언어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민자로 산다는 것은 늘 경계 위에 서 있는 일이다.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그 경계는 더 이상 나를 작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이제 한쪽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두 세계를 잇는 사람으로 서 있다.


일본 유학 시절, ‘왜 우리는 이렇게 약한가’라고 물었던 나는 이제 캐나다의 축제 한복판에서 조용히 대답한다. 우리는 약해지지 않았다. 다만 시간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성장해 왔을 뿐이다.


모자이크는 완성된 그림이 아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조각이 더해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은 더 이상 작고 흐릿한 타일이 아니다. 분명한 색을 지닌 조각으로, 다른 조각들과 나란히 빛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이민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더 이상 고개를 숙인 유학생은 아니다.


모자이크의 한 조각으로 서서, 조국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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