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에 선선한 바람이 분다. 제법 일교차 큰 날씨이다. 가벼운 외투를 하나 챙겨 들고 가을 나들이 길에 올랐다. 꽃들의 축제에 함께 동참하려고. 공주의 깊은 산속 도량에는 지금 구절초 천국이다.
지난주에 준이와 함께 구절초 군락지로 유명한 공주의 구룡사에 갔더니 완전히 만개하지 않았다. 절 뒤의 산책로에는 하얀 구절초가 꽃망울을 머금은 채 일부만 피어 있었다. 그래도 나름 근사했다. 준이는 손으로 만져보고 향기도 맡아본다. 바람에 일렁이며 무리 지어 움직이는 구절초는 언뜻 깔깔대며 웃는 준이의 얼굴 같기도 하고, 청초한 가을 여인 같기도 했다. 산속에서 꽃과 놀고 있는 아이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날만큼은 자주 가던 키즈카페나 백화점 놀이공간에서 느끼던 번잡함을 탈피하여 조용한 자연에서 머무르게 해주고 싶었다.
구절초는 전국의 산에 흔한 국화과 여러해살이 풀이다. 음력 9월 9일이 되면 아홉 개의 마디가 생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 선모초(仙母草)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부인병에 효과가 탁월한 꽃이다. 그런 연유인지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꽃 중심이 달걀노른자를 닮았고 그 주위에 연한 보라색 또는 하얀색 꽃잎이 길쭉하게 붙어 있어 시골에서는 흔히 들국화라 부르기도 한다.
준이는 떠나고 구절초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장군산을 품고 있는 3만 평 정도의 꽃단지가 있는 영평사로 향했다. 이름 있는 구절초 군락지라 커다란 산사음악회까지 하는 절이다. 이미 축제에 온 사람들이 많아 차량을 통제하고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의 구절초는 자생적으로 피어난 것이 아니라 영평사 주지스님(환성스님)의 구절초 사랑에서 비롯됐다. 산등성이에 피어난 구절초의 청아하고 순수한 모습에 반해 해를 거듭하며 심고 정성껏 가꾼 결과로 무성한 군락지를 이뤄 관광지가 된 곳이다.
이 절에서는 축제기간 내에 국수를 무료공양해 준다. 점심시간쯤에 오면.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처음 방문한 것은 10년이 훨씬 지난 것 같다(올해 24회). 언젠가 꽃구경을 왔다가 열무김치를 얹어 맛보았던 잔치국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수많은 장독이 놓인 장독대가 음식맛을 말해주고 있다. 어두워지면서 은은한 불빛과 조용한 분위기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의 산사음악회도 환상이었다.
다소 차가운 기운과 산속의 청량감, 하늘의 별빛, 그 속에 잔잔히 흐르는 음악은 마치 내가 딴 세상에 와 있는 듯했다. 특히 당시는 홍성 출신의 소리꾼 장사익 씨가 와서 깊은 산속에 묵직한 울림을 선사했었다. 이어 어느 스님의 오카리나 연주는 산속의 분위기를 청아함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이후 나는 한동안 오카리나의 매력에 빠져 열심히 악기를 불었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지금은 저녁에 개최될 음악회 리허설 중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불교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파란 가을하늘 아래 아늑한 산사와 자연, 맑은 공기 속에 스며든 풋풋한 꽃향기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는 곳이다. 여기에 음악이 더해짐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한 바퀴 돌다보니 어느 화가의 초대미술전이 열리고 있었다. 세 폭으로 이루어진 수련화가 너무 아름다웠다. 최근 그림을 처음 접하며 배우고 있는 우리에겐 미술 전시관은 관심이 많이 가는 곳이었다. 10년 간만 열심히 배워 바다나무 정원에서 우리들만의 전시회를 열고 싶은 마음에.
일정상 산사음악회를 못 보고 오는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 돌아오는 길에 한 무리 지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 군락지가 보였다. 연분홍 코스모스와 황화코스모스가 넓은 들녘에 하늘과 맞닿아 있다. 아름다운 유혹에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 연인들, 반려견들과 함께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렇게 넓은 들녘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처음 본 것 같다. 역시 무엇이든지 한 곳에 무리 지어 있어야 아름답다. 코스모스도 들국화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예나 지금이나 가을 들판을 지켜내고 있는 꽃들이 무척이나 정겨웠다.
가을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움과 희망도 선물한다. 10여 년 전 느꼈던 영평사의 아름다운 기억 위에 10년 뒤엔 또 다른 어떤 기억을 얹어 아름답게 추억할까? 청아한 오카리나에 산기슭의 구절초를 캔버스 위에 그릴 수만 있다면. 올 가을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나만의 색으로 예쁘게 채색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