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채운 배의 든든함으로 숙소에서 주는 조식은 건너뛰기로 했다. 여행을 오면 몸무게가 조금은 늘어서 돌아간다. 다시 일상에서 곧 도돌이표를 찍긴 하지만. 맛집을 다니다 보니 아무리 걸어도 먹은 만큼 소비가 되지 않나 보다. 숙소를 나서자 남편이 어디론가 향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브런치 카페에 예약을 해두었다고 했다. 오늘은 아침을 건너뛰게 하는 게 나름 마음이 편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조금 조용한 곳에서 특별식을 먹고 싶은 듯하다.
조그만 가정집 같은 분위기의 아늑한 브런치 카페이다. 일주일의 3일은 가죽공방으로, 3일은 브런치 카페를 운영하는 곳이다. 음식은 건강한 맛집이나 가게문을 여는 일수가 많지 않고, 신선한 재료가 빨리 소진되기에 예약손님만 받거나 일찍 문을 닫기도 한다. 우리는 라자냐와 닭가슴살 샐러드를 주문했다. 주인장의 정성과 건강한 맛이 우러나오는 신선한 음식이었다. 작은 식당을 알고 찾아온 것에 대해 주인장이 감사함을 전하자 남편이 아내의 생일이라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음식을 먹여주고 싶다고 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고, 내일은 남편의 생일이다. 하루차이 나는 생일을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밤 12시에 케이크를 자르며 축하했다. 내 생일을 보내며 남편 생일을 맞이하며. 어쩌면 이번의 제주여행도 우리들의 생일 자축여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생일이라는 말에 식당주인은 뜻하지 않게 커피와 예쁜 엽서까지 선물해 주며 축하해 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배려에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이후 남편은 감사함에 짧은 댓글로 고마움을 전했다. 작지만 소소한 것들이 감사함으로 다가든다.
브런치카페를 나오면서 다음일정과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에 가까이 있는 책방에 갔다. 여성전용 북스테이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작은 독립서점이다. 독립서점은 대규모 자본이나 큰 유통망에 의지하지 않고 서점 주인의 취향대로 꾸며진 작은 서점이다. 서점 주인의 취향이 구비하는 도서의 기준이 되다 보니 서점별로 특정 영역에 특화한 경우가 많다.문학의 동향을 살펴보기엔 대형서점이 좋지만 평상시 난 작지만 아담하고 정겨운 독립서점을 좋아한다.
언젠가 괴산의 미르마을에 있는 독립서점에 가서 맘껏 책을 보고 구입했던 기억이 너무 좋았다. 작은 집의 거실과 정원을 서점으로 만들고, 2층의 방하나를 숙소로 내놓아 쉬면서 편안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오늘 방문한 이곳도 서점과 북카페를 함께 하고 있었다. 2층은 여성만을 위한 북스테이를 하고 있고. 서점에는 주인만의 관점으로 큐레이팅한 책들이 있어 짧은 시간 많은 책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북집사의 모습도 인상에 남았고.
요즘은 카페투어족도 많지만 독립서점을 투어 하며 책을 읽거나 힐링의 시간을 갖는 여행객도 많다. 특히 제주에는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오신 분들이 많아 독립서점의 숫자가 60개가 넘는다. 제주여행을 이제 카페대신 책방올레와 함께하는 것으로 여행의 방향을 바꾸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싶었다. 특히 비 오는 날에는 더더욱. 오랜만에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해 책을 두권 샀다. 아니 한 권은 내가 사고, 한 권은 남편에게 선물 받았다. 생일선물로.
이렇듯 송당의 작은 마을에는 아기자기하게 볼것들이 많았다. 사진관이 있기에 흑백사진으로 오늘을 기억하고 싶기에 들어갔더니 예약자가 많아 인생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다음기회를 기약해 본다. 제주의 돌담에 기대어 커플룩을 입은 노년의 모습을 간직해 보리라. 정원이 예쁜 집. 아기자기한 식빵을 파는 빵집. 조그만 옛날식 다방, 작지만 아담한 카페 등 정겨움이 묻어나는 송당은 요즘의 제주 핫플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지도를 보며 홀로 찾아다니는 젊은 여행객들이 골목 여기저기서 자주 눈에 보였다. 1인 가족시대의 등장이라 여기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관광지와는 색다른 제주의 모습이 다소 이채롭기까지 했다. 여행에도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작은 마을을 벗어나 검푸른 물살을 가르며 우리나라 남쪽 끝 마라도도 향했다. 여러 번 제주에 왔지만 마라도는 가지 않았다. 특별한 매력을 찾을 수 없는 섬이라고 남편은 가길 거부했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주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나라 남쪽 끝에 발도장은 찍어야 국민 된 도리를 다한 것 같은 쓸데없는 애국심이 남편을 졸라 마라도로 향하게 했다. 바다를 가르며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은 끝 땋을 데 없이 멀기만 했다. 자를 대고 금을 그었다 한들 저렇게 길게 똑바로 그을 수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그 선을 따라 눈길을 이동하다 보니 마라도에 다다랐다.
마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에 있기에 태풍의 길목으로 제일 먼저 거대한 파도를 만난다. 바람의 왕국 탓에 섬엔 높은 건물도, 키가 큰 나무도 없어서 투어 하는 동안 무척 더웠다. 예년에 없던 마지막 늦더위까지 한몫하여 얼굴에 열기가 쌓였다. 몇 번 와본 남편이 적극 추천하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단지, 어느 광고의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홍보효과만이 살아있는 섬이라 여기저기 짜장면을 파는 식당들만 몇 개 있을 뿐 그다지 매력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우리나라 최남단을 30분 만에 눈에 담고 돌아오며 허황된 애국심을 드러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마라도를 또 갈 일은 없을 듯하다.
제주 끝에서 끝을 오갔더니 다소 피곤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저녁을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 원하는 밥상을 준비해 주겠다고 메뉴를 고르라고 한다. 생일상을 한 상 차려줄 모양이다. 나는 그 많은 밥상중에 술상을 한 상 차려 달라고 했다.우리는 통골뱅이찜과 신선한 해산물 회를 주는 실내 포장마차로 갔다. 내 생일날의 특별한 식사를 아주 오래된 추억이 있는 곳에서 하고 싶었다. 남편은 그래도 이름 있는 날인데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재차 물었지만 내겐 화려한 밥상이 그리 큰 의미가 되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본 포장마차가 너무도 정겨웠다. 그것도 작은 딸의 이름을 빌린 이로운 술상이. 벽에 붙어있는 가수들의 젊은 사진과 오래된 표어들이 지난 세월들을느끼게 해 주었다. 저물어가는 인생잔을 기울이며 앞으로 멋지게 익어가자고 약속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