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부끄러운 고백)누가 죄인인가?
오랜만에 시골행이다. 오랜 제주살이로 방치해 둔 조그만 농장이 궁금했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다 어느 지역을 지나면서 황당했던 아니, 너무나 부끄러웠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직도 누가 죄인인지는 판명 나지 않고 나만 거금을 날렸던. 판결문이라도 나고 벌금을 물었다면 다소 덜 억울할 텐데. 그래서 제주여행에서도(제주 살기 4) 그 음식을 거부했다. 이젠 이 글을 쓰고 다시 그 맛난 음식을 소환해 보리라.
갑자기 몇 달 전에 보았던 뮤지컬영화 "영웅"의 "누가 죄인인가?"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왜일까? 분명한 건 우리는 부부사기단이었고 경찰에 목덜미가 잡혀 작전미수에 그친 범죄자인데 말이다. 이토오를 살해하고 뤼순감옥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의 거사에 대해 당위성을 이야기한 대한민국 애국자의 노래를 비유하면서 더 큰 반역죄를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지 나로서도 오리무중이다. 기억을 지워버릴까 하다 아직은 망각의 늪을 넘지 않은 탓에 이렇게라도 고백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자 한다.
2월의 어느 화요일이다. 남편과 산책하고 유명한 드라마작가의 아트홀에 바람도 쐴 겸 산책길에 들렀다. 전시관을 한 바퀴를 돌아보고 2층에 있는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은 우리밖에 없다.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남편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날따라 주변이 조용한 탓인지 유독 벨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들려오는 첫물음에 대해 "경찰서요?"라고 되묻는 대답으로 보아 왠지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 예?,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순간 나의 예민한 촉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경찰서에서 전화 올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일까? 학교학생들이 싸움을 했나? 아니면 작은딸이 운전하다 사고가 났나?... 등 남편이 통화하는 짧은 시간에 나는 별의별 생각으로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하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남편이 물었다.
"지난 토요일 시골 갈 때 먹은 만두전골값 식당에서 계산 안 했어?"
"아니, 난 당신이 계산한 즐 알았는데... 그날 나가면서 카운터에 서 있던데 계산한 거 아니었어요?"
"포장주문한 게 아직 준비가 안되었으니 찾아갈 때 계산하라고 해서 난 잠깐 정원산책하고 있었지. 다 준비되면 부른다고 했거든. 그런데 당신이 음식봉투를 가지고 나오길래 계산하고 가지고 온 줄 알았지?"
아뿔싸, 이래저래 남편과 말을 맞추어 보니 음식값이 계산이 안된 거였다. 황당했다. 졸지에 우리는 맛난 음식을 먹고 튀어버린 사람이 되어 식당에서 경찰서에 신고가 된 것이었다. 경찰서에서 전화받기도 처음이지만 그것도 음식을 먹고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갔다는 어이없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남편은 왜 내게 계산했냐고 물어보지 않은 것인가?
나는 왜 남편에게 계산했느냐고 안 물어보았는가?
사장님은 물건을 주시면서 왜 계산이 안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신 건가?
그날도 남편과 나는 여유롭게 시골에 있는 농장에 가는 길이었다. 11월 이후 추운 겨울에 딱히 할 일도 없고 날씨도 을씨년스러워 가지 않다가 당분간 여행으로 농장을 비우게 될 것이고, 곧 봄을 맞이할 준비에 겸사겸사 한 바퀴 돌아보려고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만두전골로 유명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교육청에서 같이 근무했던 장학사님이 퇴직 후 카페를 운영하고 계시기에 소식이 궁금하여 잠시 들러 차 한잔 마시고 가는 계획을 세웠다.
11시경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다소 이른 시간임에도 손님이 꽉 차 있었다. 우리는 만두전골을 2인분 시켜 먹었다. 맛난 음식을 먹자 괜한 오지랖이 발동했다. 시골 가는 길이다 보니 적적하게 겨울을 나고 계실 시골형님도 생각나고, 냉동보관이 며칠간 가능하다고 하니 육아에 지쳐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딸도 생각났다. 하여 형님 것 2인분, 딸 것 3인분을 포장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지인에게도 빈손으로 가는 게 마땅하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만두전골을 포장해 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이리하여 추가로 3인분을 더 포장하였으니 먹은 음식까지 합하면 도합 10인분이다. 이것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간 우리는 대도(大盜) 임에는 틀림없다.
식사를 마친 남편은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아 들어오면서 미처 보지 못한 식당정원을 들러 보려고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식사를 마친 나는 다소 뒤늦게 나오면서 주문한 음식을 찾아 나왔다. 주인은 양이 많으니 조심해서 들고 가라는 걱정과 함께 식당문까지 열어주셨다. 음식값에 대한 말씀은 없으셨고, 맛있게 드시고 다음에 또 오라는 인사만 하셨다 . 맛도 좋았지만 참 친절한 식당이라는 생각으로 차에 올랐다.
우리는 지인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시골에 다녀와서 산책하는 화요일까지 만두전골값 지불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누가 지불하든 부부지간에 특별히 되짚어 이야기할만한 내용이 아니니까. 당연히 나는 카운터에 서 있었던 남편이 계산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음식봉투를 들고 나온 내가 당연히 계산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산이 되지 않았다면 음식이 손에 쥐어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 후 식당에서는 계산이 안된 걸 알고 경찰서에 연락을 한 것이었다. 주말이 끼여 우리에게 연락이 온건 화요일이었다. 경찰서와의 통화를 마치고 남편은 곧바로 식당에 전화를 했다. 저희실수로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계좌번호와 금액을 문자로 보내주시면 바로 입금하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잠시 후 문자가 와서 남편은 나에게 돈을 계좌로 송금하라고 하면서 통장번호를 불러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거금의(?) 음식값을 보내 드렸다. 내 이름 석자로... 한참 후 식당 사장님께서도 입금을 확인하시고 문자를 보내오셨다. 본인들이 너무 바빠 잘 챙기지 못한 불찰이 있었노라고 하시면서 다음에 들르면 죄송한 마음에 만두전골을 꼭 대접해 드리겠다고.
무엇보다 우리의 실수였고, 나름 양심적인 음식점 사장님도 실수를 인정하셨다. 그리고 더 이상의 아무 일도 없었다. 실수에서 생긴 일이었고 잘 해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뭔가 불쾌하고 찝찝한 감정이 계속 남아 있었다. 오해도 풀리고 다 잘 마무리되었는데 이 불편한 감정들은 무엇일까?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실수도 할 수 있을 텐데. 남편도 사과하고 음식점 사장도 사과했는데 중간에 있는 나의 이 어정쩡한 기분은 뭘까?
아마도 CCTV를 돌려보면서 이루어지는 불편한 상황들을 내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직장생활을 할 때 민원으로 인해 CCTV를 돌려 본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던 기억이다. 주로 범인 색출이거나 문제발생 시에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수단이었다. 좋은 일로 CCTV를 돌려본 경험은 없는 것 같다. 그러한 상황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는 게 영 마음이 불편했다. 보이지 않는 그 무거움의 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커다란 인생공부 했다. 은퇴 후 버킷리스트로 '안 해본 것 해보기'에는 이 항목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추가가 되어 있었다. 무척 당황스러웠던 경험이다. 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내게 다가왔던 사건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그 이후로 식당에서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저희 계산됐죠?"라고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누가 죄인인지도 모른 채.
(다소 불편한 기억이지만 이글을 씀으로 잊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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