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햇살이 가져다준 행복
오늘 여기서 행복하자!
흔들 그네가 가을 햇살 아래 움직인다. 퇴직하면서 사위가 좋은 글 많이 쓰라고 정원에 설치해 준 나의 글 샘터이다. 애써 힘을 주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이 사색하기 좋을 정도다. 아니 가을 햇살 아래 딱 잠들기 좋을 정도의 움직임이다.
불현듯 큰아이 키울 때 잠재우기 위해 조용하게 자장가를 틀어놓고 흔들 그네를 밀어주던 때가 생각났다. 잠이 들 때까지 아이는 나와의 눈 맞춤을 놓치지 않았다. 빨리 잠들기를 바라지만 엄마와 더 놀고 싶은지 오늘따라 쉬이 잠들지 못하고 눈이 말똥말똥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겨운 눈을 이기지 못하고 꿈나라로 향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애써 재우고 나니 할 일이 태산이라 마음이 바빴다. 부엌에 널브러진 우유병과 화장실에 쌓인 기저귀, 거기에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계획서까지 마무리하다 보면 12시 이전에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이는 어느 사이 결혼을 하고 손주를 낳아 정성껏 돌보고 있다. 왠지 자신에게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손주에게 올인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키울 때 양껏 보듬어 주지 못한 미안함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돌아보니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콧속에 스며드는 아침 공기가 상큼하다. 남편은 언제 일어났는지 정원의 조그만 웅덩이에 있는 연꽃을 캐어내고 그 자리에 습지 식물인 속새를 옮겨 심고 있다. 처마 끝에 차양을 설치해 놓았더니 햇빛을 가려 연꽃이 제대로 피지 못하였다. 계속 마뜩잖아하더니 오늘은 기어코 꽃 갈이를 하고 있나 보다.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조그마한 스피커에서는 어느 가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가을 아침 내겐 정말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행복이야~". 그래, 이젠 정말 완연한 가을이다.
커피 한잔을 들고 흔들의자에 앉았다. 산 정상에서부터 조금씩 붉은색 단풍이 내려오고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다닌다. 그네 옆에는 커다란 항아리 위에 세잎꿩의비름이라는 연보랏빛의 자그마한 꽃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참으로 앙징맞다. 그 옛날 나를 쳐다보며 올망졸망 모여있던 아이들 같다. 그 옆에는 항아리와 감나무 사이에서 조팝나무가 어깨를 움츠리며 힘겹게 웅크리고 있다. 올여름 꽃밭을 풍성하게 장식한 꽃인데 그네 터를 확보하면서 항아리를 너무 바짝 옮긴 탓에 자리가 비좁았나 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남편을 불러 항아리 위치를 조금 옮겼다. 조팝나무가 한결 여유로워 보이며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나는 지금 꽃밭에서 열심히 풀을 뽑는 개미 옆에서 베짱이처럼 휴식을 즐기고 있다. 흔들 그네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아침 햇살을 맞이하고 있다. 한 번쯤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남편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려고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열심히 가꾸어 놓은 꽃밭을 감상해 주는 게 남편에 대한 예의이고, 휴식을 위해 먼 길 달려와 그네를 설치해 준 사위에 대한 도리라고 자위했다. 순간 자조적인 웃음이 내 입가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스피커 음악은 계속 반복되어 흘러나온다. ‘가을 아침 내겐 정말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행복이야’라고.
퇴직하면서 숲해설가 자격증을 땄다. 남들은 작은 소일거리라도 찾으려고 자격증 취득에 도전했다고 하는데 난 오로지 손주 때문에 긴 시간 공부를 했다. 손주의 손을 잡고 꽃밭을 돌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들려주고픈 작은 욕망에서 시작했다. 정원 한쪽 구석에 손주와 잠자리 잡던 곤충 채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다음에 와서 또 놀겠다고 두고 간 것이다.
며칠 전 흔들 그네를 설치하고 손주와 나란히 앉았다. 떨어질까 봐 무서워 내 손을 꼭 잡은 조그만 손이 내 주먹 안으로 쏙 들어올 때 보드라움과 함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꼬물거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떠다니는 구름 사이에 손주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3일간 머물다 가면서 아쉬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흔들지 못하던 헤어질 때의 그 모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게 행복인가 보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왔다. 투철한 직업의식이라는 미명 아래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때론 성취욕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경제적인 이유로, 돌아보니 절대의 진리도 내게 있었고, 절대의 만족도 내 안에 있었다. 이제 일상의 소소함으로 소확행을 꿈꾸어 본다. 가을 햇살이 가져다주는 행복에 나를 맡긴다. 그래! 오늘 여기서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