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의 대물림

나도 엄마를 닮아간다.

by 바다나무

시골에 조그만 논이 있어 다른 사람이 농사를 짓는다. 땅이 크지 않아 도지로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쌀을 한 가마니(20킬로 4포대) 보내 주신다. 이 쌀이면 시집간 딸과 형님에게 한 포대씩 나뉘어 주어도 먹고 남는다. 쌀을 보내주려고 하면 딸은 사 먹어도 된다고 하면서 손사래부터 친다. 보관할 때도 없고 밥도 자주 안 해 먹는다고. 주려면 아주 조금만 달라고 되려 부탁한다. 이러다 보니 우리 집에 놓고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가져다 주었다.


지난해에는 살림이 미숙한 터라 보관을 잘못하여 벌레가 생겼다. 냉장고에 보관을 해도 그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끔씩 음식물을 버리러 가면 음식물 쓰레기장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쌀포대를 본 적이 있었다. "누가 이렇게 아까운 쌀을 버렸지?"라고 의아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이 쌀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버리지? 어디다 버리지? 아까운데 어떻게 하지?...


쌀을 처치하는 고민과는 별도로 집안은 난리가 났다. 쌀벌레로. 조그만 깨 같은 벌레가 잡아도 잡아도 결국 이구석 저구석에서 한 마리씩 계속 출현했다. 처음에는 징그러워 남편을 부르다 아줌마 본색으로 아낌없이 휴지로 사살하였다. 잡다가 잡다가 결국 대책이 없어 손을 들고 전문 벌레퇴치업체를 불렀다. 기사님은 계속 벌레가 나오면 추가로 한번 더해야 한다는 암묵적 협박을 남긴 채 카드를 무참히 긁고 사라지셨다. 그나마 한 번으로 끝나서 천만다행이다.


더 이상 벌레가 나오지 않도록 커다란 비닐봉지로 꼭 싸매 놓은 쌀을 어쩔 수 없어 시골로 가져왔다. 도저히 아파트에서는 버릴 용기가 안 났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시부모가 힘들게 농사지어 쌀이고, 김치고 자식에게 보냈더니 젊은 며느리들 먹지도 않고 통째로 다 버린다는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락없는 내 모습 다를 바 없만 그래도 쓰레기장 CCTV에 포착되는 상황만큼은 애써 모면하고 싶었다. 이 나이 먹도록 대책 없는 상황들이 나 스스로도 대책 없어 보였다.


시골계시는 형님께 말씀드렸더니 가져오라고 하신다. 당신이 살펴보고 떡을 하든, 미숫가루를 하든 다른 용도로 쓸 방법을 찾아보신다고. 정 안되면 닭 사료로 주겠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최소한 곡식을 버린다는 죄스러움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너무 고마웠다. 직장 다닌다고 제대로 하는 것도, 아는 것도 없는 어설픈 내가 창피하기도 했지만 속수무책 앞에서 절절매는 내가 더없이 한심하다.


그렇게 여름을 지나고 다시 가을, 농사를 지으신 분이 추수 때가 되어 쌀을 보내주신다고 연락이 왔다. 콜레스테롤이 높아 잡곡을 섞어 먹던 터라 현미쌀과 반반씩 보내 주시면 고맙겠다고 했다. 쌀을 받고 나누어 먹었음에도 현미쌀 한포대가 또 그냥 남아 있다. 여름이 오기 전, 벌레가 생기기 전에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더 이상은 쌀벌레와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다. 아침식사로 현미떡을 만들어 대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다란 가래떡으로.

떡집에 맡겨놓고 다음날 떡을 찾으러 갔다. 으악, 세 박스다. 뭐가 이렇게 많아? 다 어떡하지? 또 시골로 가져 갈 수 밖에. 대책 없을 때는 형님이 답안지다. 만약 친정엄마가 살아계셨더라면 그곳이 먼저 모범답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저곳 시골 이웃들에게 떡을 돌리고 나머지 떡을 비닐봉지에 두 개, 세 개씩 나누어 장하고. 다시 일곱 개씩 묶음으로 포장하여 냉동실에 보관했다. 일주일분의 아침식사 대용이다. 쩍쩍 눌어붙어 일일이 소분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두 개짜리는 우리 것. 세 개짜리는 큰 딸네 식구 것. 그 속에 준이 몫도 포함되 있다.


포장을 해서 냉동실에 넣어두니 뿌듯하다. 아니 벌레로부터 해방되어 안심이다. 냉동고에 정리를 하면서 곧 큰딸에게 가져다줄 것을 따로 포장하면서 문득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늘 엄마는 내가 자취를 하거나 결혼해서 살 때 한 끼분의 음식을 소분해 먹기 좋게 해서 가져다주셨다. 요일마다 고깃국, 미역국, 김칫국... 등 다른 국을, 작은 통마다 멸치, 콩자반, 오징어채... 등 종류별 마른반찬을...


갑자기 울컥해졌다. 내 모습에 친정엄마 모습이 있었다. "엄마 고생스럽게 뭘 그렇게 해, 나 잘 안 먹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던, 그럼에도 엄마가 가져다 주신걸 요긴하게 잘 먹었던. 그땐 그렇게 말었다. " 난 시집가면 대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요즘 돈만 있으면 뭐든 다 있는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해"라고. 그래도 다행이다. 떡을 해놓고 큰딸에게 먹을 거냐고 물보니 보내주면 맛있게 잘 먹겠다고 절을 안 하니. 아니 그보다 준이가 좋아할 것 같다고 하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제 그 나이가 되었다. 일찍 돌아가신 친정엄마 나이, 요즘은 문득문득 내 모습에서 엄마가 보일 때가 많다. 철 지난 옷을 정리할 때도, 그릇을 정리할 때도. 꼼꼼하게 살림살이를 반짝반짝하게 하셨던. 알게 모르게 어깨너머로 배웠던 살림살이가 어느새 내 손에도 익어 있었다. 대물림 대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 속에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다. 이제 그 그리움이 딸에게 가는 행복감으로 변해져 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누가 이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