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날씨 탓이다

생각의 여유.

by 바다나무

흐린 날도 그렇다고 햇빛이 있는 날도 아니다. 늘 흑백이 명확한 세상에서 살았던 터라 오늘 같은 날씨를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책 읽기 좋은 날? 따뜻한 아랫목에서 달게 낮잠 자기 좋은 날? 주전부리 옆에 두고 넷플릭스 보기 좋은 날? 등 나름의 의미를 붙여본다. 우린 시골에 있을 땐 이런 날을 풀 뽑기 좋은 날이라 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동안 편한 대로 내 눈의 기준으로만 즐겼다. 풀어헤친 머리가 그냥 아름답다고, 운치 있다고 미화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초록색 쇠뜨기를 부분염색이라고 하며 그것도 멋이라고 했었다. 갈사초라는 식물을 그렇게 포장하며 두둔했었다. 오늘은 안 되겠다. 날씨의 힘을 빌어 탕작전에 들어갔다.


전지가위로 갈사초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잘라냈다. 당캉하니 시원해 보이고 단정해 보였다. 제철 가을이 올 때까지는 아직 다섯 달이 남았으니 그때 되면 제 구실은 하리라 생각한다. 뜨기도 살아내려고 안간힘 쓰는 것 같아 그 질긴 인내(?)를 인정해 주려 했는데 안 되겠다. 오늘은 모질게 마음먹고 가늘고 뾰족한 호미로 전투자세에 돌입했다. 이건 순전히 날씨 탓이다.


정원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같은 꽃씨도 돌담 안에 피어있으면 꽃으로 인정하여 주고, 길을 잃고 사람이 다니는 곳에 서성거리면 오늘은 가차 없이 풀로 간주하여 처단하였다. 매몰찬 주인이라고, 변덕쟁이라고 험담을 하여도 오늘은 귀를 막고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였다. 다하고 돌아보니 숨이 쉬어진다. 여백이 보인다. 풀이 남기고 간 여백. 한동안은 너른 숨을 쉴 수 있으리라.


싱그러움이 있는 달에는 새록새록한 맛과 알록달록한 맛이 어울린다. 중후함 대신에 톡톡 튀는 신선함이 어울린다. 다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 가끔씩 " ~답다"라는 말을 떠올릴 때가 있다. 어떤 게 가장 나다운 것이고, 어떨 때 가장 나다운 게 발현되는 것인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어느새 원로교사 1명의 월급이면 신규교사 2~3명을 채용할 수 있다는 경제적 원리가 교육계에서도 자주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다. 오랫동안의 수고와 연륜에서 오는 경험의 노하우는 한낱 경제적 가치 앞에 낭떠러지기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것 또한 당연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들의 취업의 기회가 줄어들고 있으니 세대교체됨이 더 의미 있을 수도 있다는 나운 생각도 었다.


퇴직하니 참 좋았다. 느껴지는 공기조차 달랐다. 어떻게 살까라는 걱정도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분명 어제와는 다른 날이다. 눈 떴을 때 제일 먼저 맞이하는 날씨가 하루를 조정하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출근해야 할 직장 생활할 때와는 다르게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한동안 깨끗이 정원 대청소와 이발을 하고 나니 우리의 기분도 따뜻한 커피로 목축임을 하고 싶었다. 이곳은 시골이지만 가까운 주변에 서너 개의 대형 카페가 있다. 모두 자연을 배경으로 한 카페다. 한 군데는 지역민에게 20%의 D.C를 해주는 카페가 있어 우리는 자주 이용한다. 그런가 하면 정원관람료를 커피값에 얹어 터무니없이 비싸게 받는 카페도 있다. 우리는 이 카페는 잘 가지 않고 지인이 오면 가끔 대접 삼아 가곤 할 뿐이다.


오늘도 지역민 혜택을 주는 카페로 갔다. 주말인데도 카페가 조용하다. 주인장도 이렇게 손님이 뜸한 것이 의아스러운 표정이다. 한산하니 좋은 건지, 썰렁한 건지 오늘은 분간이 서질 않는다. 카페너머로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오늘따라 조용하니 더 잘 들린다. 풍광도 커피맛도 여유라는 이름으로 삶의 여백을 만들어준다. 이 또한 날씨 탓이다.


저녁을 밖의 데크에서 먹으려니 뭔가 을씨년스러웠다. 아마 어제의 노을이 오늘 저녁밥상에는 동참하지 않은 탓이라. 역시 뷰가 맛을 더하는 조미료보다 더 강력하다. 방안에 차려진 밥상이 오늘따라 간소해 보인다. 오늘은 새참로 먹으려고 사온 김밥에 멸치육수를 우려내어 만든 잔치국수다. 야외에서 먹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초라한 밥상임에도 느껴지는 이 아늑함은 뭘까. 이것도 날씨 탓에 느낄 수 있는 안온감이다.


밖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한다. 시골의 밤은 깊다. 환한 조명아래 최근 피어오른 클레마티스가 화려하다 못해 고결하게 정원의 어둠을 지켜낸다. 이 꽃의 꽃말이 "당신의 마음은 진실로 아름답다"라 하니까 바라보는 내 마음도 진실로 아름다워 지길 소망해 본다. 저녁노을대신 꽃에라도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주절거리며 내 마음을 전해 본다. 이 또한 날씨 탓이다.


어제와 똑같은 날인데 어제와 달랐다. 가끔은 날씨에 따라 내 감정이 쌍곡선을 그릴 때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도 나름 행복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 지금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기록해 본다. 매 순간 삶이 다름으로 의미 있게 다가들어 생각의 여유를 갖게 된다. 이 또한 날씨 탓라고 말해 보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