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인 60년대 말 70년대 초, 우리 가족은 서울 변두리의 봉화산 아래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중앙선 철로가 지나는 망우역 근처였다. 옛날 기와집들 사이에 띄엄띄엄 텃밭이 있고 블록 담장에 새로운 집들이 중간중간을 파고 들어갔다. 초가집도 한둘 눈에 띄었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한편으로는 무와 배추 같은 푸성귀를 가꾸는 야채밭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고, 다른 쪽에는 먹골배 과수원이 언덕 너머로 이어졌다. 봄에는 하얀 배꽃 물결 위로 물방울처럼 벌들이 떠다녔다. 산자락 끝의 허물어져 가는 공동묘지는 아이들이 즐겨 찾는 전쟁 놀이터였다. 수수대로 만든 창을 던져서 서로 맞추는 싸움 놀이를 많이 하였다. 바싹 마른 수수깡 모서리에 손이 베인 줄도 모르고 한 명 한 명 맞출 때마다 고함을 질러 대며 얼굴이 땀범벅이 되도록 놀았다.
우리 집 뒤의 널따란 공터에는 건축 공사장에서 쓰는 여러 가지 크기의 각목, 합판, 철판, 기다란 침엽수 통나무들이 잔뜩 쌓여 있고 주위는 철망 울타리가 둘러싸여 있다. 이모부가 경영하는 건축 회사에서 공사가 끝나면 다음 공사를 위해 잠시 보관해 놓은 건축 자재들이다. 아버지는 당시 이모부 회사에 근무하면서 이 건축 자재를 관리하는 일을 하셨다.
건축 자재 중에 아시바라고 하는 곧게 뻗은 통나무가 있다. 가로세로 엮어서 건물 외벽을 세울 때 쓰인다. 수십 개의 아시바를 원뿔 모양으로 곧게 세워 놓으면 인디언 텐트처럼 가운데에 제법 넓은 공간이 생겼다. 통나무가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그 안은 동굴처럼 어두웠다. 가끔 동네 개들이 들어와서 똥을 싸고 나갈 뿐 아무도 이곳에 누가 들어가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틈새를 비집고 그곳에 들어가 혼자 노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주위를 에워싼 아시바 울타리가 외부의 적들을 막아 주는 방패같이 느껴져 편안했다. 얼기설기 틈새로 푸른 하늘이 비치고 오후의 햇살이 그림자 사이로 내리 꽂힐 때에는 신비의 장소에 와 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속에서 널빤지를 깔고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누워서 상상의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하였다.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 할 때에 고무줄을 끊어 도망쳐서 여기에 숨으면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밖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그냥 돌아갔다. 말썽부렸다고 어머니에게 얻어맞았을 때도 울면서 그곳에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혼자 앉아 있었다. 그러면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나를 부르며 찾아다녀도 나는 그곳에서 나오기가 싫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나만의 은밀한 피난처이자 힐링 아지트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큰 트럭이 건축 자재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동물 해부하듯이 나의 아지트 통나무가 하나씩 뜯겨져 차에 실려 나갔다. 영문도 모른 채 멀찌감치 바라보는데 가슴이 아려 왔다. 돌아갈 고향이 사라진 실향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후 내 비밀의 힐링 아지트는 추억 속에 오랫동안 봉인되었다.
그런데 몇 달 전 어느 날 막내아들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보여 주며 하나 사달라고 졸랐다. 천장과 사방이 막혀 있고 안에는 LED 램프와 책상, 책장이 일체형으로 붙어 있는 큐브 형태의 가구이다. 필기도구와 여러 권의 책을 넣어 둘 수 있는 붙박이 책장, 노트북 컴퓨터를 사용하기에 적당한 데스크 면적, 의자 앞뒤로 부족하지 않은 내부 공간 등이 쓸모 있어 보였다. 상품명도 업체에 따라 ‘스터디 큐브’, ‘1인용 독서실’, ‘스터디 룸’ 등으로 소개되었다. 밀폐된 공간이라 소음도 어느 정도 차단되고 주의 집중이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 남매에게 각자 하나씩 공부방이 있는 것은 아니니 하나쯤 있으면 유용할 것 같아 곧바로 주문하였다.
며칠 후 설치 기사가 와서 세팅을 끝내고 나니 내 키만 한 높이의 입방체가 작은 성채(城砦)처럼 거실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 안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의자에 앉아 보았다. 천장과 사방의 벽이 막혀 있는데 넓지도 아주 비좁지도 않아 집중하기 좋은 공간이다. 이곳에 홀로 있으니 아늑한 느낌이 몸을 감싸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어렸을 적 자주 들어가 놀던 그 비밀의 힐링 아지트가 떠올랐다. 오래전에 수도원으로 피정 가서 독방에서 묵상했을 때의 기분과도 같다. 석가모니가 고행했던 동굴 안에도 이런 느낌일까? 한참 동안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막내가 사달라고 했던 이 ‘스터디 큐브’를 이제 거의 내가 독점하다시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그 ‘스터디 큐브’ 속으로 들어간다. 책도 읽고 글도 거기에서 쓴다. SNS도, 유튜브 시청도, 줌으로 하는 화상 회의도 그 안에서 한다. 커피도 마시고 심지어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그 안이 편안하다.
굳이 누가 문을 열어 볼 일도 없는데도 안에서 문을 잠가야 마음이 놓인다. 문을 잠그는 순간 바깥과 여기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홀로 있는 오로지 나만의 공간, 나의 우주이다. 봉인되었던 비밀의 힐링 아지트가 추억 속에서 귀환하였다. 배꽃의 물결 위를 떠다니던 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