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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 일기 1

여행자의 기록 29

by 홍재희 Hong Jaehee




서구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가도 딱 이런 걸 볼 때 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드는 순간. k.d. lang 이 7월에 공연을 한다는 포스터. k.d.lang을 좋아하는지라 무척 반가웠다. 한국에는 인지도가 전혀 없어서 생전에는 한 번도 오지 않을 뮤지션들의 콘서트를 여기서는 언제고 볼 수 있구나.... 부러워라. 하지만 여기서 영국에서 날아온 뮤지션 '패션저' 공연 본 거로 만족해야지.





금요일 해질녘. 주말을 앞두고 퇴근길.



길마다 사람들이 분주하다. 트램도 승객으로 터져나갈 듯. 그 와중에도 애엄마와 유모차를 들어 올려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길을 비켜주는 다정한 손길이 있다. 멜버른에는 길거리 여기저기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 휠체어 타고 나온 장애인 노인들까지)을 심심찮게 마주친다. 문득 맘충이라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먹는 한국 엄마들이 떠올랐다. 가슴이 아팠다.



트램에 탄 사람들을 둘러본다. 승객들 다양성으로 봐서는 뉴욕이나 런던 또는 파리 베를린 한복판에 있는 것도 같다. 영어가 가장 많이 귀에 맴돌지만 중국어, 스페인어, 불어, 힌디어, 일본어, 한국어도 심심찮게 들린다. 시내 나오면 하루에 한 번은 들린다. 오늘도 마트에서 길에서 귀에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한국인들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언어가 공기 중에 방울처럼 떠다니면 좋겠다. 영어 중국어 말고도 네팔어, 몽고어, 베트남어, 타갈로그어도 들리면 좋겠다.



멜버른 시내 중심가 어디든 길거리에서 멜버른시가 제공하는 무료 와이파이를 접속해서 쓸 수 있다. 특히 스마트폰 없는 나같이 공용 와이파이를 잡아 쓰는 사람에게는 천국이다. 서울에서도 못 해본 여름 바람맞으며 길거리에서 와이파이 접속. 한국이 초고속 인터넷 연결망 속도를 자랑하던 시절은 끝났다.



길거리 곳곳에 벤치가 있어 그냥 앉아서 멍하니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25kg 은 족히 넘을 것 같은 거대한 배낭을 등에 메고 지나가는 젊은 배낭 여행자를 봤다. 살랄라 풀치마를 입고 발레리나 샌들을 신은 아리따운 백인 처녀였다. 내가 메면 배낭에 파묻혀 사람이 안 보일 테지. 이제 나는 10kg만 넘어도 허덕인다. 초대형 배낭을 가뿐하게 짊어지고 샌들 따위를 신고 아스팔트 바닥을 걸어가는 시절은 진작에 빠이빠이.......


나는 관광객도 아니고 여행자도 아니고 거주민도 아니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고 어느 쪽도 아닌 사이를 부유한다. 언제부터인가 내게는 모든 여행이 일상이 되었다. 배낭과 트렁크와 다시 돌아갈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빼면 나는 어느 곳에서나 그들 중 한 명으로 길을 걷고 밥을 먹고 장을 본다. 낯선 곳에 떨어질 때 느끼는 흥분은 이내 익숙한 편안함으로 바뀐다.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들과 똑같은 일상을 찰나에 살다가는 사람, 이들의 삶 바깥에서 같은 공기를 잠시 마시고 떠나는 사람, 나는 그런 나그네다.




밤이 가로등 사이로 날개를 펴기 시작하니 또다시 곳곳에서 거리 악사 가수들이 노랫소리 음악 소리가 바람결에... 추억에 잠긴다. 시공간을 넘어 서울에 있다가 과거로 갔다가 지금 여기 미래로.....



그때! 노숙자 언니가 내 옆에 털썩 앉더니 담배 한 대 있냐고 묻는다.

이를 어째. 나 담배 안 피워 끊었...

너무 상심한 표정. 그녀가 손에 꼭 쥔 라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저기요. 있었으면 꼭 드렸을 거예요. 정말 없어서...


너 홈리스야? 그녀가 묻는다.

음... 뭐라 답해줘야 하나. 일 초 고민했다. 아닌데 했더니

진짜 아니야?

엄청 실망한 표정.

그 말에 날 둘러봤다. 커다란 비닐 장바구니를 들고, 야구 모자 쓰고, 후줄근한 후디 입고, 간편한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홈리스 언니와 나는비슷한 옷차림.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그녀가 나보다 좀 더 꾀죄죄하고 좀 더 나이들었다는 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담배 대신... ) 물이라도 좀 드세요.

나는 생수통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생수를 받더니 쿨하게 쌩유! 를 날리고 표표히 사라졌다.

만국 공통. 어느 나라 어딜 가나 매번 겪는 일.

담배라도 나누었음 이야기꽃이라도 피웠을 텐데.

아쉽다. 노숙자 분들과 난 뭔가 쫌 통하는 게 있다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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