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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남은 인생은요?

by 홍재희 Hong Jaehee





1

아프다. 아름답다. 노래하고 싶다. 불 지르고 싶다. 이 책을 당신 손에 쥐어주고 싶다.

여기, 이거 꼭 읽어. 지금 당장.

-메건 스틸스트라 , 『The Wrong Way to Save Your Life』 작가



너무 아프고 슬프고 아름다워서 불 지르고 싶은 책이 있다.

그 불태운 재를 남김없이 먹어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책이 있다.


'남은 인생은요?'


이 책이 그랬다.

도서관 신간 서적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한 후 빌려와 단숨에 읽었다.

글 마디마디에 맥박이 뛰고 단어의 사이사이에 숨소리가 들리는 책이다.

이 책이 사람이라면 나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처절하며 숨 막히게 아름다운 글을 쓴 작가에게 미칠듯한 질투와 무한한 경외심을 느낀다.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인 책.

글이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글이며 글이 책이 된 책.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

고 책상 앞에 의자를 끌여당겨 앉아보지만

한 자도 쓰지 못하고 텅 빈 모니터에 먹혀버리는 순간이 반복된다.

텅 빈 여백에 제 홀로 깜박거리는 커서만 넋 놓고 바라본다.

커서는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외친다.

깜박등을 켜야지 이 바보야!

찰싹찰싹찰싹.


2.


나는 쉼표, 쉼표, 쉼표 대신 마침표, 마침표, 마침표만으로 이루어진 글을 하나 쓴다.

마침표가 끝없이 이어져 A4 지 한 장을 빽빽이 메울 때까지

2차원 평면 위에 셀 수 없는 점이 이어져 길을 이루고 선을 이루다가 결국 '금'이 되었다.

이 금은 너 따위는 감히 넘어오지 말라고 명령하는 금이다.

나는 글을 쓴 게 아니라 금을 그어놓았다.

아, 썅. 오늘도 글렀다.

3.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일주일 째 하고 있다. 기분이 안 좋다.

계속 새벽 두 시 세 시 급기야 네 시에 자고 있다. 기분이 매우 안 좋다.

눈을 뜨면 아침 열 시, 눈을 뜨면 아침 열 한시.

꾸물거리다가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첫 끼를 먹고

뒤돌아서면 낮은 이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중이다.

늦게 시작한 하루가 너무 짧아서 쫓아가기에도 숨이 차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한다. 기분이 안 좋다.

성급한 밤이 온다. 이미 늦었다. 나는 추격을 포기한다.

이런 날은 회복 불가능한 변비에 걸린 것만 같다.

머릿속이 화장실에서 밑을 덜 닦고 나온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곧 닥쳐올 것만 같은 어떤 것을 감지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느낌,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격렬한 반동,

일상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다니며 살아가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일상이 손아귀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이 순간 내게 통제권이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공허에 시달린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는 폭발 직전의 시한폭탄이고 문자적으로는 폭발했지만 물리적으로는 사그라든 불발탄이다.

일상의 통제권을 상실한 느낌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

일상의 통제권을 빼앗기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

내가 일상에 다른 이를 들이고 싶지 않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해야 할 일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나를 둘러싼 외부 세계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내 일상만이라도 의지대로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나는 무기력하게 나자빠져있는 하루를 일으켜 세운다.

해야 한다와 하기 싫다 사이에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 밤 열 한시 전에 자고 아침에 해 뜨면 일어나는 일상으로 시계추를 돌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남은 인생 살아야지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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