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하기엔 먼 닮고도 먼 당신
지금쯤이면 언니는 제 아들과 함께 비행기 탑승을 시작했을 것이다. 나를 빼고 어머니와 동생은 공항까지 배웅을 갔다. 가족들이 공항 가는 택시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후 나는 발길을 돌렸다. 마음 한편이 무겁고 답답하다가도 한편으로 속이 후련하고 홀가분해졌다.
때때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피를 나눈 형제자매 지간에도 남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언니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도 통하지 않는 사람. 뭐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는 사람. 그래서 받은 것 없이 주는 것 없이 싫은 사람. 아마 남이었으면 일찌감치 눈길도 안 주고 각자의 길을 가버렸을 사이.
자매는 사이가 좋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어렸을 적부터 옷매무새 하나부터 거울을 보며 단장하던 모범생 계집애였던 언니는 사춘기 때 아무 데나 퍼질러 앉고 침 뱉고 욕설을 하는 거친 문제아인 날 싫어했다. 나는 밖에서는 제 얼굴과 옷차림은 깔끔 떨면서 제 책상 구석에 고린내 나는 스타킹과 양말 팬티를 쑤셔 넣던 언니를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술과 담배는커녕 외박 한 번 안 하고 통금 시간을 어겨본 적 없이 음전하게 대학을 졸업한 언니와 달리대학생 때 담배냄새를 풀풀 풍겨대며 술 퍼마시고. 외박을 하고 아빠와 싸우고 급기야 집을 나가버린 나를 언니는 상종하기 싫은 이해할 수 없는 인간 말종 정도로 여겼다.
언니는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늘어놓고 싶어 했지만 나는 언니가 늘어놓는 그런 이야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서운하고 상처받은 일을 곱씹고 기억 속에 차곡차곡 재워놨다가 나중에 터뜨리는 뒤끝 작렬인 언니. 반면 남이 뭐라든 말든 관심 없고 남에게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성격인 나.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진소리를 가장 못 견뎌하는 나는 엄마와 언니의 잔소리를 듣다 듣다 못 참으면 폭발하곤 했는데 고등학생 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늘어놓는 언니의 코를 주먹으로 갈겨버린 후 우리 사이는 더욱더 멀어졌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친구 중에 첫째들 장남 장녀인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항상 부모의 기대에 따르려 하고 남의 시선에 민감하며 의무감과 책임감에 넘치는 이들이 내게 손윗사람으로서 가르치려들고 오지랖을 펴고 훈계를 하려 드는 걸 또는 애정이라는 이유로 간섭하려 드는 걸 나란 사림은 기질적으로 못 참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웬걸. 출국일이 얼마 남지 않은 며칠 전. 나름대로 가족 코스프레를 하러 집을 방문한 날. 어김없이 언니와 시비가 붙었다. 언니와 나는 몇 년 만에 만나도 똑같다. 어린 시절 그때로 으르렁대지 않으면 서먹하고 어색한 관계로 소 닭 보듯이 하는 사이로 되돌아간다.
너는 어떻게 노후 대책도 없고…..
라는 언니의 말 한마디가 내 비위를 알량한 자존심을 긁었을 것이다. 첫째의 노파심에 걱정에서 나온 말이었겠으나 주제넘었다. 내가 발끈하자 언니는 자격지심이라 했다. 어이없어서 너나 잘해! 대거리로 받아치며 그런 네 인생이나 제대로 책임지라고 쏘아붙였다.
언니는 머리뚜껑이 열렸을 것이다. 그러자 이 년 전에도 그때도 넌... 언니는 뜬금없이 몇 해전 한국에 왔을 때 내가 한 말을 끄집어냈다. 나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일을 언니는 토씨하나 안 빼고 되풀이했다. 아, 또 시작인가?
헬게이트가 열렸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들려온 소리.
넌 선을 넘었어.
그르릉 그르릉 부글거리며 끓어오른 마음의 소리.
입 닥쳐!!!
.리고 고힘치고 싶었지만
그런데 그나마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일까. 측은지심일까내가 마음속에 그어놓은 경고의 선을 넘어와도 그 어린 시절처럼 입 닥쳐하고 좆까! 라며 욕을 하진 않았다. 주먹도 나가진 않았다. 그저 언니가 미친 듯이 퍼붓는.날선 비난을 잠자코 들었다. 침묵으로 무시했다. 어쩐 일인지 화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감정이 일지 읺았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이 말할 수 없이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조카와 어머니 앞에서 또 이따위 싸움질이라니. 나란 인간은 참으로 한심하다. 우울해졌다. 나란 인간은 고작 이런 인간이다.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숨길 수 없는 것 안 되는 게 있다. 나는 피붙이고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걸 받아주고 감내해야 한다는 태도를 끈끈한 애정을 갈구하는 시선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그 이기적인 욕망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원치 않는데도 싫은데도 부모와 가족의 기대치에 부응해야 한다는 믿음도 이해할 수 없다. 혈육은 다른 몸이라도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란 말처럼 극도로 싫어하는 말도 없다. 가족도 내게는 남이다. 나 역시 나에게 남이기 때문이다.
읽던 책의 한 구절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행성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것은 행성 간의 거리와 상호 간의 끌림이 합쳐진 결과다.'
언니와 나는 정말로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행성이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은 충돌 또는 폭발 아니면 파멸과 파괴가 기다리는 지도. 문득 세상 모든 것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족과 나 사이. 언니와 나 사이.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거리를 애써 좁히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 다른 행성에서 온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면 둘 사이의 거리 궤도를 지키며 각자에게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가슴이 아려온다. 이후로는 언니라는 존재에 대해 그에 대해 마음을 비울 것이다. 흘려보낼 것이다.
심란해서 밤 공원을 홀로 오래오래 걸었다.
그 순간 황조롱이 한 마리가 후드득 날개를 쳤다.
달라진 길 위에서 다른 방향을 향해 각자의 삶을 알아서 잘 살기를 바라며.
새소리가 멀리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 간다.
생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허망한가.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집으로 갈 시간이다. 그림자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