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혐오에 반대한다

혐오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

by 홍재희 Hong Jaehee


.


1.


예전 이태원에 살 때 사정상 집 없이 떠돌아야 했던 내게 두 달간 머물 곳 잠자리를 제공해 준 사람은 가깝게 이웃에 살던 불법 체류 노동자 필리핀 친구였다. 나는 부모가 버젓이 서울에 사는 대한민국 국적 소유 한국인이었지만 형편이 어렵고 급작스런 도움을 가족이든 주변에 청하기 어려웠을 때 베이비시터와 파출부로 일하는 가난한 싱글맘 이주 노동자 여성에게 환대를 받았다. 그녀는 내 사정을 이유불문 자신의 처지처럼 공감하여 이해해 주었다.


관광비자로 석 달 동안 뉴욕에 머물 때 나는 뉴욕 한인식당에서 불법체류 노동자로 거의 7-8년을 일하며 플러싱에 살고 있던 사촌오빠를 만났다. 불법 이주이기 때문에 그는 한인 거주지에서만 일하고 있었다. 발각되면 강제추방될까 불안에 떠는 삶 한국에도 돌아올 수 없지만 앞으로도 기약 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는 미국 뉴욕이라는 곳에서 삶을 지속하고 싶어 했다. 맨해튼 32번가 코리아 타운에서 밥을 먹고 헤어질 때 그는 여비에 보태 쓰라며 내 손에 돈을 쥐여주었다. 뉴욕 비싸잖아 얼마 안 되지만 차비라도 하렴. 그리고 한국에 잘 돌아가렴.


서울에서 관광비자 만료 후 불법으로 일하고 있었던 영국인 애인은 홍대 술집에서 만취한 한국 남성에게 얻어맞았다. 백인에 대한 열등의식과 동시에 단일민족 한국인이라는 우월감에 배배 꼬여 있던 뉴욕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자칭 뉴욕 유학파 그 한남은 뭣도 아닌 흰둥이가 한국 여자를 끼고 논다는 게 배알이 꼴려서 자기가 하는 영어발음이 우습냐며 자길 무시한다고 주먹을 들었다. 수줍고 얌전한 성격인 애인은 행여 경찰서에게 끌려가면 불법체류가 드러나 문제가 될까 봐 겁먹고 조용히 맞았다. 그가 소위 선진국이라는 영국에서 날아온 백인이라도 돈 없고 백 없는 노동자는 불법체류자라면 특혜는 없다. 그러나 그는 소위 ’선진국’에서 온 ‘영어권’ ‘백인‘ ’남성‘이라는 존재만으로도 한국에서는 유형무형의 반사이익을 얻는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이 나라에서 그가 만일 파키스탄이나 네팔 방글라데시에서 온 남성이라면… 아니 여성이라면 얼마나 더 열악한 처지에서 차별받으며 얼마나 더 위험에 노출되며 멸시를 당해야 했을까 생각했다.




2.


"너희 나라로 돌아가 너네 나라서 일하지 왜 한국에서 일해 불법으로 일하는 너희들 잘못이야 너희들 때문에 내가 못 사는 거야."


이 같은 혐오 발언은 미국과 같은 서구에서 무수히 많은 한국인들이 불법체류로 일하다 영주권을 신청하고 시민권자가 된 자신들의 이주역사를 뒤돌아본다면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기회의 땅 자유의 나라 선진국에 우리는 불법체류를 해서라도 머물고 기회를 잡아 일하고 배우고 그 사회에서 사는 이주민이 될 수 있어도 당연히 그럴 수 있어도 내 나라 내 땅 대한민국에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의 외국인이 불법 체류를 하거나 영주권을 받거나 노동을 하는 것을 내 이웃으로 사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이중성.


한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여권을 소유한 나는 여성으로서 약자이나 한국인으로서 기득권자이다. 필리핀 친구는 여성으로서도 약자이며 미등록 이주민로서도 약자이다. 영국인 애인은 선진국 백인남성으로서 기득권자이지만 불법체류자로서 약자이다. 뉴욕에 사는 사촌은 남성으로서 기득권자이지만 불법체류 유색인종 이주민으로서 약자이다.


세계화, 자본과 노동의 글로벌 이동, 국가별 정치경제적 우열, 선진국과 후진국, 인종과 종교에 대한 편견, 백인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신자유주의, 식민지, 내전, 난민, 빈곤, 이주노동, 나와 타자, 다수자와 소수자, 남성과 여성, 토착민과 이주민, 한국인과 외국인 등등... 겹겹이 쌓이고 중첩되는 삶의 층위.


세상을 한 면으로만 사고하면 부득불 편견에 빠진다. 나와 너의 관계 안에는 무수히 많은 같고도 다른 층위가 있다. 그리그 그 관계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 사회 문화 환경에 따라 항상 변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는 고정된 불변이 아니다. 사이와 경계는 맥락에 따라 계속 변한다. 변화와 차이를 무지를 인정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고정관념에 빠진다. 그리고 배우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게으름 내 생각이 옳다는 독단적 확신 왜라고 회의하지 않는 단정적 사고에서 고정관념은 비롯된다.


3.


한국인들의 이주민 특히 난민에 대한 인식은 한국 사회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의식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OECD 가입국이라는 경제 규모에 걸맞은 인권의식이 전무한 한국에서 대두한 난민 공포증은 민주주의와 평등의식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체화한 적이 없는 한국인들의 자화상이라 생각한다. 인권 교육의 부재 또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세계화를 부르짖지만 그 세계화는 한국인만이 세계로 진출하는 것이지 정작 그 세계가 그들이 내가 사는 곳으로 찾아와 내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라고는 배운 적도 없거니와 어느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한국인들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면서 인색하다 못해 치졸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다. 나보다 더 잘 사는 선진국 부자와 강자를 동경하며 부러워하고 얻을 거 없나 상자리에 숟가락 얹고 끼어들려 비벼대면서 그 선진국 G7 부자 나라 집단이 우리에게 너도 이제 부자니 곳간 좀 열라는 소리에 한국은 아직도 가난하다며 죽는소리 볼멘소리를 늘어놓고 행여 내 곳간 털릴까 봐 나보다 조금만 못 살아도 만만하면 남들을 죄 도둑놈으로 몬다. 전형적인 졸부 근성이다.


‘나는 돼도 너는 안 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순수하고 너는 위험하고 불순하고 더럽다 ‘라는 우열에 따른 이분법, 혐오의 논리, 넘어서려면 공감이라는 역지사지가 필요하다. 무지는 두려움과 공포를 공포는 혐오를 혐오는 폭력을 낳는다. 혐오는 계급 성별 젠더 인종 국적 종교 경제력에 따라 힘의 위계로 타자를 배제 차별하면서 시작된다. 외국인 난민 혐오는 여성혐오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와 뿌리가 같다. 소수자는 존재만으로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진정 차별에 반대한다면 모든 이름의 혐오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