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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마틸다 효과

by 홍재희 Hong Jaehee

1.'


초등학생 시절. 같은 반 남자애와 말싸움을 했다.

그 녀석은 세상의 위인은 모두 남자라고 으스댔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결국 여자는 남자 아래 있는 존재라며.

아니라고 내가 반박하자

녀석은 다시 잘난 여자 위인이 있으면 어디 대보라고 큰소리를 쳤다.

내가 우물쭈물 하자 녀석은 신이 나서 놀려댔다.

신사임당 유관순 퀴리부인 말고 누가 또 있어? 아, 또 있다. 우리 엄마.

멍청한 자식이 잘난 척을 하는 게 너무 꼴 보기 싫었다.

조잘거리는 그 녀석의 주둥이에 재갈을 물리고 싶었는데 밉상인 면상을 한 대 치고 싶었는데

그리고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세상에는 그 세 명 말고도 위대한 여성들이 많고도 많아!

다만 사람들한테 알려지지 않은 거라고 그래서 이름을 모르는 것뿐이라고.

네가 안 배워서 모르는 거라고.


2.


이 나라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지독히 성차별적인 속담이 마치 사실처럼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다. 불과 이십 여 전 만해도 그랬다.

40대 이상 한국인들 중 수많은 남성들이 아니 여성들도 아직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젊은 남성이라고 다를까. 내색은 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암탉이 울면 집이 망한다'라는 망언을 농담이랍시고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남자가 있었다.

면전에 대고 말해줬다.


"암탉이 안 울면 집안이 망하는 거야.‘


남자는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한 놈.

'달걀은 암탉이 낳는데 그 닭이 울지도 못하게 하는 집이라면

암탉이 스트레스받아 알도 못 낳을 거니 그런 집은 망해도 싸다.'라고 대꾸해 줬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성차별주의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숨을 쉬고 함께 살아야 한다니.

한국은 갈 길이 멀고도 멀구나 싶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과거의 '암탉'은 '페미니스트'를 의미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는 빨갱이 취급을 받는다.

한국 사회의 여성차별.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성차별의 대상은 여전히 여성이다. 단지 부르는 이름과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 나라의 성차별주의자들은 이제 암탉(페미니스트)이 울면 (집안도 아니라) 사회가 망한다라고 호들갑 떨고 있다.


자신은 결코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은 그 근거로 다음을 든다.


자신은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약자인 여성을 보호해 주는 남자라며.

무지의 소산. 이들은 성평등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여성을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라 여기며, 자신이 열등한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것 자체가

남성우월주의다.

사람 대 사람으로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대 여성이라는 젠더로 사람을 구별 지어

한쪽 성을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보호하고 보호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주의다.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핵심이 아니다.

둘 다 사람이고 인간이다.

그 사실을 머리로 가슴으로 인정하고 일상에서 삶에서 체화하지 않으면 당신은 성차별주의자 남성우월주의자가 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역사란

여성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남성인 너와 똑같은 이성과 감성과 지능과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단지 그저 여자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걸 인정받기 위해서 싸워온 지난한 투쟁의 역사다.


3.


어린 시절 '퀴리부인' 위인전을 읽었다.

노벨상을 받은 그녀는 이름이 없었고,

그저 피에르 퀴리의 아내인 퀴리 부인이었다.

위대한 과학자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는 왜 '퀴리 부인'으로 불려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내 의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여성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 혁명가들이 '마틸다 효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지워졌을까.

언어를 빼앗긴 여성들이 사라진 그녀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모두가 칼 마르크스와 레닌의 생을 거론할 때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주세죽’의 생을 읽었다.

서양미술사 수업 시간에 카라바지오의 회화를 칭송할 때 성폭력 희생자이자 생존자로서 화가로 우뚝 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떠올렸다.

일제 조선 식민지 해방 투쟁에서 박헌영의 이름 석자는 기억해도 혁명가 '주세죽'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위대한 그녀들의 일생은 스캔들로 물어뜯기고,

과학자, 화가, 사상가, 혁명가라는 이름 대신

'그 남자의 여자' ‘아내‘ ’부인‘ ’ 정부‘ 따위로 폄하되고,

공적은 버려지고, 업적은 삭제되고, 미담은 가십과 루머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소리 없이 망각의 저편으로 봉인된다.

이제 그녀들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잊힌 사람들이 된다.


거대한 분노 너머 그 끝에 절망보다 더 깊은 슬픔이 있다.


"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이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나는 에드워드 월슨과 토마스 모건 대신

네티 스티븐스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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