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과 나이 듦 사이에서
수술 후 몇 해전부터 종종 그랬지만 올해 들어 어머니는 '죽고 싶다'는 말을 계속한다. 만나서 얼굴을 봐도 하고 전화를 해도 한다. 하염없다. 통화를 하면 이야기의 반이 '죽고 싶다'. 나는 묵묵히 '죽고 싶다'는 말을 듣고 또 듣는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버겁고 때로는 숨이 막힐 것 같지만.... 한숨을 얇게 들이쉰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기 싫고 이야기를 듣기 싫고 통화를 하기도 싫다는 생각이 북북 치받쳐 올라오지만 다시금 마음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어머니와 나의 통화는 사실 대화가 아니다. 서로 주고받은 말을 대화라 한다면 어머니의 일방적인 이야기, 한쪽만의 메아리다. 예전에는 주고받는 핑퐁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공을 건너면 어머니는 내 공을 받지 않는다. 그 공은 어디론가 떨어져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어머니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신만의 공을 끊임없이 쉬지 않고 내게로 던진다. 통, 통, 통, 통, 통. 그러면 나는 어머니의 공을 받기만 할 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공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공을 받기만 해야 한다는 것을 조용히 깨달았다.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공을 바구니에 계속 담으면 된다. 네. 그러셨구나. 아하. 이 세 마디면 충분하다.
요즘 들어 어머니는 서운한 게 많다. 어머니는 내게 당신의 노여움과 서러움과 서글픔과 외로움을 토로한다. 다른 자식에게도 남들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속내를 내게는 필터 없이 쏟아낸다. 어머니의 마음에 가시가 되어 박힌 깊고 깊은 상처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생채기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하고 딱지가 내려앉고 흉터가 된 그 수많은 상처들.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당신이 상처받고 아프고 힘들었던 오랜 서사가 담겨있다.
어머니는 늘 과거로 돌아간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나는 어머니가 탄 기차에 올라 어머니 옆 좌석에 앉는다. 그리고 어머니가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어머니의 과거와 옛 일을 풍경처럼 지켜본다. 내게는 늘 똑같은 배경일뿐인 그 이야기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지금 이 순간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 순간들. 이제 어머니에게 미래는 없다. 돌아갈 과거만이 존재한다. 내가 알았던 무소의 뿔처럼 강인했던 그 어머니는 점점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변해가는 어머니에게 적응해야 한다.
ㅡ 너희들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겠지만 난 이제 니들 한 마디에도 예전 같지 않아. 무너져. 마음이 약해져. 너무 힘들어. 그래 니들은 다 바쁘고 니들 인생이 있는데..... 다 늙은 내가 말해봤자 뭐 하겠나. 너무 오래 산다. 죽고 싶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고통스럽다는 어머니. 약을 바르고 진통제를 먹고 수면제를 먹고 그럼에도 아침에 또 눈을 떠서 하루를 보내야 하고.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그래도 밥 한 숟갈 떠먹으러 또 일어나야 하고. 어머니는 아파서 죽고 싶고 힘들어서 죽고 싶고 그냥 허망해서 죽고 싶다고 그만 살고 싶다고 한다.
오늘도 어머니는 또 이렇게 내게 하소연한다. 우리의 통화에서 늘 반복되는 이야기. 매번 듣는 레퍼토리.
ㅡ나 죽게 약 좀 사다오.
ㅡ무슨 약?
ㅡ뭐든 먹고 죽을 수 있는 약.
ㅡ 쥐약? 농약?
ㅡ 그래. 그 거.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히 대답한다.
ㅡ엄마. 근데 한 가지 아셔야 할 게. 그런 거 먹고 단번에 목숨이 끊어지는 게 아네요. 숨 끊어질 때까지 고통스럽대. 알고 있어?
ㅡ......................
ㅡ 차라리 굶으세요. 곡기를 끊는 거. 그게 낫지 않아?
전화 너머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 그러더니 말문을 잇는다.
ㅡ 그러려면 니들이 집에 한 달 동안 얼씬도 하지 마.
ㅡ 우리가 무슨 상관이에요?
ㅡ 니들이 없어야 내가 안 먹고 굶어서 가지.
ㅡ 근데 엄마. 우리가 안 가도 말이야. 매일 오는 요양보호사는? 경로당에서 전화 오고 총무가 찾아오고 00 아줌마도 집에 들르고 이모에 엄마 친구에 가만히 안 둘걸. 결국 연락 안 되면 경비실에서 문 따고 들어올 텐데?
ㅡ......................
ㅡ 그니까 후후.. 엄마는 찾는 사람이 많아서 인기가 많아서 안 돼.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대답이 없는 어머니.
그러더니 은근슬쩍 말을 돌린다.
ㅡ 됐어! 더 길게 얘기하지 말고.
( 지금까지 말은 엄마가 다 했어요.)
ㅡ 그런데... 너 낼 올 거냐?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내가 쌉T 라 망정이지. 이럴 때는 T라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내가 어머니댁을 방문하는 거로 통화는 일단락되었다.
이렇게 오늘의 통화 종료.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밝고 명랑하고 단정하며 총기가 살아있는 노인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총명하던 어머니는 그 사이 많이 무너졌다. 아니 점점 작고 여리고 연약하고 가냘픈 아이가 되어가고 있다. 소녀에서 아이로 아이에서 아기로 변해갈 어머니. 아아 어쩐다. 어머니를 아기로 대할 준비가 나는 아직 안 되었는데.
ㅡ나 이제 38kg이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어머니는 89세다. 그러면 어머니는 당신이 90세라고 박박 우긴다.
ㅡ만으로 89세예요. 아직 90 아니라고요.
ㅡ 89나 90이나. 그게 그거지. 너도 이 나이 먹어봐라.
그래, 돌아온 곳으로 갈 때가 된 어머니의 서러움과 상처받은 마음과 억울한 투정과 죽게 해 다오~라는 하소연을 듣고 있는 이 순간이
어머니 당신이 저 별로 영영 떠나고
지구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진 후에
먼 훗날 사정없이 사무쳐
그리움이 휘몰아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가슴이 풍선처럼 펑 터지고 무릎이 푹 꺾이는 날이 있겠지.
그날을 떠올리며 내일을 생각하자.
ㅡ 그나저나 저녁 잘 드시고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봬요. 어머니.
ㅡ 그래도 네가 있어서 애기 들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