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병 53일 차
1.
6인실에 어머니가 입원한 후로 다섯 병상의 환자가 그새 두 번 바뀌었다. 대학병원 입원실은 환자가 퇴원하기가 무섭게 곧 다른 환자가 들이닥친다. 세상에 이렇게나 수술 환자가 많다는 것이 여기서는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지난주부터 여섯 병상 중 다섯 병상의 환자가 전부 여든 살 이상이 되었다. 만 나이로 79, 80, 80, 81 84. 환자가 거의 여든 이상이다 보니 안동에서 와서 입원, 수술한 쉰아홉 살 환자가 할머니들에게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똑같은 수술을 해도 그는 수술 후 2 주만에 보조기를 차고 보행기 없이 복도를 힘차게 걸어 다닌다. 등산을 너무 좋아해서 주말마다 산에 갔다는 그는 보조기를 차고서도 벌써부터 산에 갈 꿈에 부풀어 있다. 여든 살에 보기에 그는 여전히 젊다. 아직 청춘이다.
2.
고관절 수술과 척추 수술을 끝낸 할머니 두 분이 수술실에서 병실로 돌아온 날, 밤새도록 섬망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해댔다. 그 바람에 병실의 간병인과 보호자들 모두 잠을 잘 수 없었다.
만성 중증 환자 말기 환자 또는 전신마취한 고령환자가 수술 후 깨어나 겪는 일시적 정신 착란이 섬망이다. 척추 병동에 지내는 50여 일 간 오다가다 다른 병실에서 섬망을 겪는 환자들의 고함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우리 병실 일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어머니가 섬망을 겪지 않은 것이 어쩌면 오히려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81살 환자는 밤새 자꾸만 어딜 가야 한다고 보챘다.
이모야, 언니야, 거기 가자. 거기 거기 가자. 가자.
간병인이 물었다.
할머니. 거기가 어딘데요? 어딜 자꾸 가자고 그래. 여기 병실이에요.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환자가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간병인이 환자를 어르고 달래도 아무 소용없었다.
이모야. 언니야. 언니야. 가자. 가자. 집에 가자.
그 순간 소설 < 오발탄>이 떠올랐다. 실성한 철호의 어머니가 그랬다. 가자. 가자. (북에 있는) 집으로 가자.
철호의 미친 어머니 소원은 단 하나. 집에 가는 것이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이 할머니도 같았다. 눈을 뜨고 처음 마주한 풍경이 병실이 아니라 집이길 바라는 마음. 그것은 섬망도 막을 수 없는 회귀 본능 원초적 욕망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척추 수술 후 모든 환자는 절대 일어나지 말고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섬망에 시달리는 할머니는 극심한 통증도 잊은 듯 벌떡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할머니를 일어나지 못하게 병상에 다시 눕히고 할머니는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다시 못 일어나게 붙잡고 밤새 실랑이가 벌어졌다. 새벽녘 급기야 할머니의 병상은 황급히 간호사실로 옮겨졌다.
3.
고관절 수술을 한 80세 환자는 아파 죽겠다고 간호사를 불러달라 밤새 소리를 질렀다. 입원하기 전부터 온갖 약을 달고 산 환자는 자신이 먹던 약 판피린을 달라고 애원했다. 암 수술도 했고 당뇨와 편두통에 시달리는 환자였다. 환자는 막무가내였다.
판피린을 줘요! 내 약, 판피린을 줘요, 줘! 줘! 줘! 왜 안 줘! 성모병원에선 줬는데 여긴 왜 안 줘!
잠결에도 불현듯 궁금증이 일었다. 으응? 판피린이 그토록 용한 만병통치약이던가? 수술 후 주입하는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보다 더 센? 할머니에게 판피린은 당신의 위태한 삶을 지속하기 위해 붙들고 있는 한가닥 남은 동아줄 부적 같은 생명줄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환자가 아무리 애원해도 간병인은, 간호사 역시 이미 진통제에 수액 봉지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른 약을 줄 수는 없었다. 집도 의사의 허락 없이는 수술 직후 다른 약을 처방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안 돼요. 할머니. 수술 직후라 조금만 더 참아요. 아침에 의사 선생님이 오케이 하면 그때 줄게요.
그렇게 밤새 내 약을 내놓아라 간호사, 간병인과 실랑이를 벌이던 할머니는 드디어 아침에 본인이 그토록 애타게 원하던 판피린을 손에 넣었다.
판피린을 먹고 나자 할머니는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세상모르게 긴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4.
오전 8시. 간밤의 대소란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평소 같은 병실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할머니들끼리 칭찬 릴레이가 이어진다. 살짝 치매증세가 있는 79살 환자가 또다시 두 손을 들어 우리 어머니에게 엄지 척을 했다. 이 할머니는 뭔 말만 하면 말끝마다 양 엄지 손가락을 번쩍 든다.
할머니 최고! 우리 중에 젤 나이 많은데 다리도 번쩍 들고 최고!
병실에 까르르 웃음보가 터졌다. 이 환자는 우리 병실 노인 중에서 초긍정의 아이콘이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고 씩씩한 할머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오락부장 하지 않았을까 싶다.
병실에서 최고령인 우리 어머니가 답례 인사를 건넸다.
댁은 아직 젊은가 흰머리가 별로 없으셔. 난 파뿌리처럼 허연데.
그랬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나도 할머니처럼 하얀 백발이었는데 도로 까매진 거예요. 시금치를 먹어요. 내가 시금치 먹고 머리가 다시 검어졌어요.
노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설마? 정말? 순간 믿을 뻔했다. 그 순간 할머니의 간병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내게 눈을 찡긋했다. 아차차, 할머니가 치매가 있다 했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피식 웃는다. 알면서도 이 할머니가 말하면 깜빡 속는다. 알고도 속는다. 거짓말이라기엔 할머니의 표정은 가식 없이 진실되고 아이처럼 순수하다.
5.
갑자기 창가 병상에 누운 80세 할머니 한 분이 노래를 부른다. '청춘을 돌려다 아아아 오~~'
똘망똘망 암팡진 외모에 허리가 ㄱ자로 꼬부라진 점잖은 노인이다. 평상시에도 말수가 적고 조용한 분이었던 터라 깜짝 놀랐다. 병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혼자 웅얼거렸다.
아이고 내가 벌써 80이라니. 청춘이 어제께 같았는데.... 내 신세가 이리될 줄... 몰랐어. 이럴 줄 알았음 그렇게 안 살았어... 후회 돼..... 청춘을 돌려다 아오 젊음을 다 아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그러자 할머니 환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아아아..
청춘을 돌려다아오오오오...
나훈아의 '청춘을 돌려다오'가 병실 안에 나직이 동심원을 그리며 울려 퍼졌다. '청춘' 그 두 마디가 돌림노래처럼 돌고 돈다. 아침 햇살이 할머니들의 흰머리 위에 날개를 퍼덕이며 살포시 내려앉았다. 할머니들의 주름이 자글한 이마가 반짝반짝 빛났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백발 할머니들의 합창은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얘야, 너도 늙어봐라. 언제까지 네가 젊을 거 같으냐. 나도 이 나이는 처음이란다. 늙는 건 서럽고 서러운 거란다. 단 한 번뿐인 생이 이리 빨리 흘러갈 줄 미처 몰랐단다. 가는 세월 붙잡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이 늙은이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지 못한 게 후회막급이란다.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후회 없이 주저 없이 두려움 없이 살아라.
6.
아, 내가 이 할머니들 때문에 짜증 나다가도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 귀엽고 얄밉고 꼴 보기 싫다가 웃기고 사랑스럽다. 당신의 나이를 아직 살아보지 않았지만 당신 덕분에 어렴풋이 일흔 고개를 여든 고개를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당신이 살아온 긴 세월의 무게 탓에 허리가 주저앉았으리라ㅡ 오랜 세월 당신의 삶을 지탱한 그 허리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