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사랑의 딜레마
1.
일전에 만난 어느 남성 지인이 불쑥 말하길 섹스에 대한 욕구가 사라져서 그게 불만이라 했다.
헷갈렸다. 성욕은 있는데 정력은 없다는 말인지. 정욕은 있는데 성욕이 없다는 건지. 성욕과 정욕은 같은가 다른가 그게 그건가. 따질수록 더 헷갈린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욕정이 일이 않는다는 거냐 아니면 하고 싶은데 생리적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거냐 또는 서지 않거나 사정이 안 되는 거냐라고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뭐 들어보니 대충 감이 오긴 한다. 과도한 음주나 비만 스트레스 별별 이유를 들지만 나이 먹을수록 자연스러운 현상 결국 노화 때문이 아닌가? 난 심드렁하게 반문했다. 여하튼 욕구가 사라졌다면 드디어 욕망이라는 번뇌에서 벗어났으니 차라리 자유롭지 않겠는가 생각했지만 상대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던진 푸념이 떠올랐다.
성욕은 있는데 정욕이 일어나지 않는단다. 끌리는 사람도 없고 꼴리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나 만나긴 싫고 불만이란다. 그럼에도 욕구는 사라지지 않아 괴롭다는. 그 말인즉슨 타인에게 쏟아부을 시간과 에너지는 없다는 소리. 즉 연애나 지속가능한 관계에 관심과 애정을 쏟을 시간도 기력도 정열도 한마디로 정념이 없다는 뜻이다.
좋다. 그러면 하룻밤 상대를 구하거나 혼자 하면 되잖냐 했더니 툴툴대며 그건 또 싫단다. 나 참,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이해할 수 없군. 하기야 애당초 사람이 제가 아닌 담에 남을 이해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오해나 쌓지 않으면 다행인지도.
문득 과거에 만났던 남자가 생각났다. 팔팔한 이십 때 만난 그는 성욕도 정력도 넘쳤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한 가지. 지력이었다. 펍에서 만나면 오 분도 못 가서 할 말이 떨어졌다. 서로 멍하니 TV 스크린을 쳐다보다 술 한잔 주거니 받거니 그러다 그것도 시큰둥해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갈까?라고 물었다.
남자들이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며 백치미라 하는데 여자에게 남자도 그렇다. 앤더슨 또는 안데르손이라는 이름의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올 듯한 조각 같은 몸을 지녔다. 스웨덴에서 온 북유럽 미남의 표본. 그의 날렵한 콧대와 아름다운 입술, 바다처럼 깊고 수정같이 파란 눈동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연상시키는 그의 벗은 몸은 한없는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 듯 그의 외모에 넋을 잃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나는 깨달았다. 보기 좋은 떡이 언제나 먹기도 좋은 법은 아니라는 것을.
그가 입만 열면 내 머릿속엔 그만 극장 불이 커졌다. 이렇게 대놓고 할 말이 없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결국 몇 번 만나다 그렇게 흐지부지 헤어졌다. 그는 '성욕'이 흘러넘쳤지만 정작 나는 그에게 정욕(!)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왜 만났을까. 자문했다.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순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솔직해야 했다.
우리는 섹스'만' 했다. 그건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만남일 뿐이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나는 그를 사, 랑, 하, 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섹스가 나쁘진 않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성욕. 욕구 충족에 가까웠고 나는 그것으로 족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하지 않아도 섹스할 수 있다, 사귀지 않아도 섹스로 친밀감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를 통해서 '알'았다.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냐고 할 수 있다.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자신이 왜 사랑하는지 어떤 사랑을 원하는지를 잘 아는 이는 뭣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성욕과 정욕 같은 욕구와 욕망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어떤 확고한 이유. 그것이 사랑의 이유, 사랑하는 이유다. 따라서 똑같은 사랑 고백이나 애정 표현을 하더라도 사랑하는데 자기 마음과 행동에 명확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일관성 있는 사랑을 한다. 사랑하는데 자격은 필요 없지만 기술은 필요하다.
2.
연애하고 싶은데 만나고 싶은 남자가 없다며 볼멘소리로 타로점을 보러 온 친구가 있었다. 책이나 영화 유튜브를 백날 들여다봐야 소용없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깨져봐야 사람에 대한 기준이 생긴다고 했더니, 아닌(!) 사람 만나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거나 에너지를 소모하기 싫단다.
요컨대 사랑은 하고픈데 상처받기는 싫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시작도 못하고 사랑의 혼란을 감정 낭비로 여기며 간 보고 재느라 사람에 대한 다양한 경험치를 쌓지도 않은 사람이, 즉 사랑과 이별에 대해 단단한 자기중심 즉 내성도 기르지 못한 마당에 도대체 누굴 만나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설령 만난 들 정욕과 정념이라는 격한 감정의 풍랑에 좌초하지나 않음 다행일 것이다.
이해가 안 가서 그렇다면 도대체 네가 생각하는 연애는 뭔가?라고 물었다. 항상 나'만' 바라봐주고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과 모든 걸 함께 하는 것이란다. 한숨이 나오려 했는데 참았다. 24시간 365일 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 사랑이라. 정말 그걸 원해?
그런데 그러다간 사랑이 무르익기도 전에 힘들어서 진짜 죽는다. 상사병이 괜히 병인 게 아니다. 사랑의 열병이 '병"인 이유. 열정과 집착이 한 끗발 차이인 이유. 나는 반문했다. 너에게 사랑이란 배타적인 소유와 집착과 독점이라는 욕구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니.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소유욕 독점욕 지배욕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혹시 그건 또 다른 집착은 아닐까?
연애를 하고 싶다면서 너는 지지리도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더 정확히는 남을 보는 눈이 아니라 너 자신을 보는 눈이 없는 거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고들 하는데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사랑할 때 스스로에게 눈이 멀어 있는 이들이 허다하다. 제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고 제 마음을 들여다볼 줄도 모른다. 자기가 누 군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 합리화도 하루 이틀이다.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사람은 누굴 만나든 누굴 사랑하든 똑같다.
자신이 철석같이 사랑이라고 믿는 상에 휘둘려 환상 속에 사는 인간이 즉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상대를 제대로 알 리 없다. 섹스던 연애던 사랑이던 주제파악이 급선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은 우리 시대의 사랑에 가장 필요충분한 기본조건이다. 외모 경제력 학력 배경 따위가 아니라.
3.
여전히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그녀들. 낭만적 사랑의 이면에 그 뒤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 본질을 남김없이 깨우쳤을 나이에도 여전히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그녀들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연애하고 섹스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이야기. 아아, 지루하다. (언제나 그렇듯 이 각본은 결혼 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사랑과 섹스와 결혼의 삼위일체가 무너진 지가 언제인데. 2025년에도 여전히 낭만적 사랑이라는 신화는 특히나 여성을 옭아맨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섹스 자체로 쾌락이 가능하며 결혼 제도 밖에서 사랑은 더 활활 타오른다. 원래 자유연애란 제도를 파괴하고 일탈해야 그 본래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안전하게 기어들어가고자 각본대로 움직이는 연애에 무슨 삶의 충동이 생동하는 재미가 있겠나.
오히려 결혼은 사랑과 섹스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가부장제 하에서는 결혼제도 자체가 남성보다 여성에게 특히 성차별적이기 때문에 여성의 성욕과 정욕을 옭아매고 여성 스스로가 성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 (사실 일부일처제는 위선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제도다.)
소유가 아니면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남자와 그 소유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쾌락과 결혼을 분리하는 남자와 결혼이 아니면 쾌락은 절대 안 된다라고 믿는 여자가 만나서 하는 섹스는 도대체 뭘까. 연애를 조건으로 결혼을 전제로 한 섹스? 섹스를 해서 자식을 낳아 자손을 번식시켜 내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생물학적 본능의 문화 관습적 행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쾌락도 사랑도 자유도 아닌 불감증과 욕구불만 결국 불행의 시작이다.
과거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의 과업 그 완성은 결혼에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성(섹스)과 결혼의 연관성이 무너지면 '사랑'이라는 허상도 무너진다. 다시 말해 결혼은 낭만적 사랑을 믿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연애결혼에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필수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흐르고 어떤 계기를 거치면서 그 이데올로기 자체에서 점점 어긋나고 벗어난다. 그러다가 결국 연애 ×결혼은 궁극에는 의례가족만 남는다.
속 빈 강정. 이 같은 결혼제도의 공동화는 결국 점진적인 성해방의 결과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결국 성욕과 정욕, 사랑과 섹스, 연애와 결혼 등등 이 모든 주제와 욕망 앞에서 느끼는 지극한 혼란과 욕구불만 상태는 우리의 현실이 바로 아노미라는 걸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지금 성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좋든 싫든 인정 해야만 하는 사실.
섹스와 결혼이 분리되면서 동시에 사랑과 섹스도 분리되고 있다. 사랑 없이도 상대와 섹스할 수 있다. 쾌락만을 위한 섹스도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반대급부로 우리는 섹스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한마디로 섹스 과잉인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섹슈얼리티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정작 섹스를 하면 할수록 연애는 이벤트 따위의 겉치장, 즉 의례만 남고 사랑은 점점 사막화되고 있지 않은가.
4.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지만 그 사랑을 무엇으로 생각하는가는 사람마다 천자만별이고 상황과 때에 따라서 그 사랑도 달라진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현대인의 사랑. 자본 시장의 논리에 포섭된 도시인의 연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랑. 프사와 채팅으로 선택하는 소비적 사랑. 갖고 싶다 소유하고 싶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을 실천하는, 소비자의 과시적 사랑.
5.
나이 들수록 늙어갈수록 과하게 욕심부리면 추해진다. 그나마 있던 매력이 더 반감될 뿐이다. 더구나 안 되는 걸 억지로 부여잡고 용을 쓰는 남자들을 볼수록, 사랑을 빌미로 존재증명을 위해서 상대에게 집착하는 여성들을 볼 때.......... 안쓰럽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결국 과학이 떠들어대듯 호르몬, 호르몬 때문이다. 사랑도 정념도 그 모든 게 호르몬의 장난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에로스는 현대에는 호르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까. 호르몬이 살아 펄떡일 때 이것저것 재고 따지지 말고 사랑하고 즐겨라. 호르몬이 제 역할을 다하고 꺼져가는 시점에는 당신의 젊은 날 수많은 밤을 수없는 날을 괴롭혔던 그 성욕과 정욕이란 욕구 또는 욕망도 바람처럼 먼지처럼 사라져 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없으면 없는 대로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되 붙잡지 말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
어디서든 주제파악이 기본이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 성욕인지 정욕인지를 구별하는 것. 연애를 하고 싶은 건지 결혼을 원하는지 알아채는 것. 사랑인지 욕정인지 분별하는 것 등등. 제가 뭘 원하는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는 동시에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없는 지를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모르면 내려놓고 배울 자세가 되어있던가. 이도 저도 아니면서 다 가지려는 욕심,
그 욕심이 문제다.
결국 인생은 타이밍. 사랑도, 연애도, 섹스도 타이밍. 그러니 알 때까지 배우고 깨지고 또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사랑은 쉽게 할 수 있는 본능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기술이다."
ㅡ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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