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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Liquid Love

질투는 사랑이 아니다

by 홍재희 Hong Jaehee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유독 질투가 심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있다.

바로 질투와 사랑을 혼동하는 것이다.

자신은 사랑하는 마음에 질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상 질투는 상대를 적으로 여길 때 생기는 감정이다.

왜냐하면 질투를 하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다는) 상대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질투는 '악마에게 가장 어울리는 속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질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불안에서 온다. 다시 말해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내 상상력에서 불안이 생기는 것이다.

질투의 속성은 '불안'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혹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를 속박하고 사랑하는 이의 자유를 구속하려고 든다.

어찌 보면 이는 지배와 통제의 방식이다.


반면 사랑의 속성은 '자유'다.

상대가 나를 속박하고 있다고 느낄 때 내가 신뢰받지 못하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고

오히려 속박하려 하지 않을 때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질투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상대가 나를 사랑할지 말지는 온전히 상대의 몫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상대를 사랑하는 것뿐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서로를 인격적으로 성장시키고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정신적으로 한 차원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질투는 자유가 아니라 이기심과 소유욕 정복욕에서 비롯된 어긋난 사랑의 형태다.

"(가질 수 없다면 ) 널 부숴버리겠어! "라는 유명한 드라마 대사가 있었다.

질투심은 나와 상대가 서로 다른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내가 가질 수 없으면 남도 가질 수 없다는 극강의 이기심,

자신과 타인(세상)을 분리하지 못하고 하나로 보는, 미분화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즉 어른이 되지 못한 미성숙한 사람은,

연애와 사랑에 있어서도,

엄마와 자신이 하나라고 믿었던 어린 아기처럼,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이기적인 어린애로 정신적으로 퇴행할 수 있다.

상대에게 자기가 울고 떼쓰고 요구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뭐든 원하는 걸 들어준 엄마가 돼주길 원하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 반복되는 사랑과 질투라는 서사가 항상 파국으로 점철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떠한 정념이건 천진난만하게 나타났을 때 아름답다. 그런데 질투에는 천진난만함이 없다. 사랑과 질투는 여러 면에서 닮았지만, 일단 그런 점에서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순수하지만, 질투는 언제나 음험하다. 어린아이의 질투도 마찬가지다. "
ㅡ 철학자 미키 기요시 --- p.90

불안은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내 상상력에서 생긴다.

단순히 상대에 대한 불안에서부터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그 모든 불안이라고 이륾 붙일 수 있는 감정의 정체의 본질은 같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모를 때,

상대가 있건 없건 간에 나는 나일 수 있다는 자각이 부재할 때,

나 자신과 세상 또는 세계 사이에 대한 거리 감각을 상실할 때,

자신감 대신 자존심만 셀 때,

자기 객관화 대신 자기 연민과 자기애만 가득할 때,

타인과 세상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에게 배신당하거나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왜곡된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허상이

바로 불안이다.

그래서 질투를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두려워하는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임을 상기하면서 불안을 줄이는 방법과,

상대가 나를 사랑할지 말지는 온전히 상대의 몫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상대를 사랑하는 것뿐임을 깨닫는 것뿐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마음뿐이다.

타인의 감정과 마음은 내 소유가 아니라 그의 소유다.

우리는 타인의 몸과 마음을 소유할 수 없다.

터인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안이 싹트고 질투에 사로잡히게 된다.


파국이다.

사랑하는 데는 돈이 필요 없지만 연애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맞다. 사랑은 마음만으로도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이벤트가 되어야 하는 소비 지상주의 시대에 연애를 하려면 돈이 든다.

요즘 세상은 사랑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연애를 소비해야 '사랑한다'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연애를 과시하고 '소비'해야만 사랑을 확인하는 요즘에는 서로 사랑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해진 것이다.

그러나 돈 없어서 사랑도 못하고, 연애도 계산기를 두드리며 가성비를 따지고,

조건이 안 맞아 결혼도 포기하는 지금 시대일수록 더더욱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연애가 소비력이 되어버린 지금, 역설적으로 사랑이 사라진 시대일수록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육욕적 사랑이 영속하면 점차 정화되면서 한결 차원 높은 사랑이 된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다. 사랑의 길은 상승의 길이며, 그래서 인문주의의 관념과 일치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인문주의의 밑바탕에는 에로티시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ㅡ미키 기요시 <인생론 노트>

나는 사랑에도 사랑하는 데 있어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돈으로 환산되거나 질투로 변질될 때 사랑의 의미와 사랑의 영속성이 파괴된다.

철학자 미키 기요시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질투는 늘 분주하다. 질투만큼 분주하면서 비생산적인 정념의 존재를 나는 모른다."

"개성 있는 사람일수록 질투에서 멀어진다."

심리적 고문의 한 측면이 질투다.

수치심은 내면화와 외면화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

"질투심의 가장 유치한 현태가 탐욕이다. 놀랍게도 질투르를 하는 사람일수록 질투의 대상을 소유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고 믿는다. 탐욕의 형태를 한 질투를 현대 광고계는 교묘하게 이용하는데, 광고계는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라는 최면과 도 같은 암시를 퍼트린다."

마지막으로 존 브래드쇼 <수치심의 치유>의 한 대목에 마음의 밑줄을 긋는다.

“나는 질투를 하지 않으려고 항상 애썼다. 마음 편해지자고 질투를 너무 가까이하면 그게 미혹으로, 욕망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이가 가진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멸시와 분노, 질투심으로 벼려져 날이 선 목소리.

수치심 없이 공공연하게 욕망을 떠들며 모든 것을 갈망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

내 생각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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