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자연스럽게도 늙으면 누구나 죽음을 더 자주 더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 된 자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제 자식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생각을 애써 떨쳐낸다.
뱃속에 태아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때,
우렁찬 울음소리로 태어난 아이를 제 품에 받아들일 때,
그 어느 누구도,
방긋방긋 웃고 아장아장 걷는 자식이 미소 짓는 사랑스러운 이 아이가
제 자식도 남들처럼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생각을 하면서 자식을 낳고 키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자 공포일 것이다.
자식보다 오래 살아서ㅡ 부모보다 앞서 떠나는 자식을, 자식의 죽음을 목도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생의 고통일 것이다.
인간 정신은 물리적 요구만큼이나 생물학적 요구에도 철저히 복종한다.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충동이 종의 생존에 있어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많은 이들이 내게 아이를 갖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유전자를 이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다들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애를 낳지 않겠다 다짐했다. 초등학생 때부터다.
하지만 나는 내가 왜 자식을 원하지 않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애를 자식을 낳는다… 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싫다'라는 마음이 먼저 올라왔고 나는 그 마음에 굴복했으며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왜? 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지인들에게,
여자로서 출산의 기쁨을 누려보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을 똑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게 동의를 구하고 공감을 원하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마다
이곳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색하고 불편했으며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토록 수많은 이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살면서 지금까지도 나는 엄마나 어머니로 불리는 삶에 대해 꿈꿔본 적이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단 두 번 그런 충동이 올라온 적이 있긴 했다.
한 번은 이 십 대 초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사랑의 열망에 휩싸였을 때다.
젊음이 마구 방종했던 시절, 오직 에로스의 열정만으로 치달았던 순간,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이끄는 성적 충동에 사로잡혀 잠시 그 사람을 닮은 애를 상상했다.
두 번째는 삼십 대 초 사랑했던 사람과 강렬한 섹스의 열락이 끝난 후, 그의 고이 잠든 얼굴을 잠시 쳐다볼 때였다.
순간 이 사랑스러운 사람의 유전자를 받아 아이를 낳는다면 어떨까 상상했다.
그러고 나서 곧 그 상상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생물학적 호르몬이 명령하는 원초적 성적 ‘본능'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본능에 충실한 것은 섹스만으로 족하지, 섹스라는 성적 충동의 결과로써,
내 유전자를 이 세상에 남기는 것을, 자식을 내 삶의 전부로 끌어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 나는 임신과 출산을 원하지 않았다.
그 상상만 해도 뭔가 어색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나는 나와 똑 닮은 아이를 이 세상에 내놓고 싶지 않구나.
나의 유전자를 물려줄 그 무엇을 만들고 싶지 않구나.
임신과 출산의 기쁨보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일이 주는 행복감에 대한 상상보다
나를 똑 닮은 그 무엇이 헤쳐나갈 운명을 평생토록 오롯이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불확실성에 인생을 베팅하는 유전자의 본능과 충동 그리고 그 짜릿한 행복감을 맛보겠노라는 욕망보다
생의 불가해함이 가져다줄 파고와 나와 그 자식의 생로병사에 대한 슬픔이 더 컸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이들의 충만한 기쁨, 그 사랑의 찰나보다
자식을 떠나보내고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의 비통함과 슬픔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의 슬픔은 바로 내 슬픔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던졌다.
당신은 똑똑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고,
동정심도 많고, 인류애가 있는 휴머니스트야.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야.
나는 너 같은 사람이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세상에 아무 생각 없는 인간들이 무턱대고 자식을 낳아 엉망으로 애를 키우는 마당에.
네가 애를 낳지 않았다는 건 너무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야.
그때 나는 그런 말을 한 친구에게 엄청나게 화가 났다.
제 딴에는 나를 위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너의 그 생각은 끔찍한 엘리트주의라고 어쭙잖게 오만한 우월감이라고 친구를 성토했다.
무슨 그 따위 위험한 선민의식이 다 있어.
거칠게 심하게 말하면 너의 그런 생각은 나치즘과 다를 바가 없어.
세상에 부모 되기에 더 나은 자격을 지닌 사람도 없고, 부모가 되면 안 될 사람도 없어.
자식을 낳고 안 낳고는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그 사람의 선택일 뿐이야.
네 말 따나 내가 모든 이를 향한 인류애가 있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네 말대로 내가 박애주의자라면 이상주의자라면 그렇다면
나는 유전자의 원초적 본능을 넘어선 인류 종족 전체에 대한 본능이 더 강하기 때문에
내 유전자를 남기는 것에 이 생의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자 친구는 머쓱한 듯 엷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본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영생을 꿈꾸며 자손을 남긴다.
하지만 그 또한 한없이 덧없는 일이다.
두 세대만 흘러도 당신이라는 한 사람은 까맣게 잊혀 먼지로 사라지고 인류라는 거대한 흐름만 남을 것이다.
어쩌면 탄생과 죽음은 한 개인의 생을 뛰어넘어 그 자체로 무한한 것이니
태초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살다가 떠나가는 것에도 목적도 의미도 존재도 없는 것.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싸우지 않는다.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있어야 하며 살아있음을 희망을 지속하는 것.
세상에는 개인의 원초적 본능과 욕구에 충실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개인주의자들 중에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훨씬 큰 무리 본능을 가진 이들도 있다는 것을.
선한 무리 본능. 모든 인간을 향한 도덕과 책임감이 더해진 본능. 바로 그것.
그리고 나는 내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는 원초적 본능과 번식에 대한 강한 욕구보다는
선한 무리 본능이 더 강한 인간이라는 것을.
슬프지만 슬프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게 생겨먹었고
그렇게 살다 갈 사람
그렇게 이생을 마칠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