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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라는 직업

by 홍재희 Hong Jaehee


병원 가는 길. 내려야 할 데를 놓쳐서 다시 버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따릉이를 타고 가려했으나 자꾸 대여 오류가 떴다. 잠금장치가 말썽이다. 안내 전화를 걸었더니 다른 자전거를 이용하란다. 따릉이 거치대에 있는 단 한 대의 자전거였는데! 할 수 없이 버스를 타기로. 그런데 깜박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정류장을 지나쳐서 다시 버스. 갈아탔음에도 또 지나쳐서 또 갈아타고. 도합 네 번. 버스 갈아타는 거로만 한 시간 넘게 길바닥에서 허비. 아 쌍!



나는 대중교통에서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보면 안 된다. 뭔가에 몰입한 순간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 중인지조차 홀라당 까먹기 때문이다. 그 순간엔 안내방송조차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냥 창밖만 바라보면 되지 않냐고? 창밖 풍경을 보고 있어도 골똘히 생각에 집중한 순간 또는 창밖 풍경에 넋을 잃운 순간 머릿속에 다른 정보가 입력되지 않는다. 뭔가에 빠져들면 나머지는 모조리 음소거되어 블랙아웃 사라지는 희한한 정신세계. 이 정신 때문에 여행길에 차편을 놓치고 길을 잘못 든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주전자 냄비를 태워먹은 것도 부지기수. 나 자신을 안 잃어버린 게 얼마나 다행이냐. 몰입의 즐거움은 때때로 코고 작은 일상의 어설픔을 동반한다.


젠장! 생각하지 마! 생각을 하지 마!


1주 만에 통원. 2주 치 약만 타고 가라고. 아직 고개를 좌우로 돌릴 때 뒷머리가 롤러코스터 급강하할 때 붕 떠오르는 듯한 잔어지럼증이 남아있지만. 거의 이석이 제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 괜찮다고 한다. 괜, 찮, 아. 이 말이 이토록 마시멜로처럼 감미로울 줄은.


잠은 잘 자나요? 밥은 잘 드시고요?


의사의 질문이 엄마의 자장가처럼 귓가를 맴돈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일 년 하고도 삼백 육십 오일 늘 듣고 사는 새로울 것 없는 흔해빠진 이 말이 오늘따라 왜 이리 따사롭게 느껴지는지. 의사의 목소리가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응석받이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89 58.


내 혈압 수치를 보더니 의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뗐다.


ㅡ혈압이 낮네요. 저혈압이 고혈압보다 더 위험한 거 아시죠?


ㅡ네에.... 전부터 죽 저혈압이었어요. 기력이 달리면 일어날 때 살짝 어지럽곤 했어요.


나는 조금 우울한 음성으로 나도 잘 알고 있다는 투로 대답했다.


ㅡ 편두통은 나아지셨다니 진통제는 빼고요. 혈액순환제와 기립성 저혈압에 처방하는 약을 추가로 넣어드리겠습니다.



십 년 전 첫 발병 후 세 번째 재발. 2년 연속 해마다 일 년에 한 번씩. 매번 같은 담당의사를 마주하니 친근하다. 정든다. 의사에겐 나란 환자는 날마다 보는 수많은 환자 중 한 명.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그 누군가이겠으나. 당신은 항상 차근차근한 말씨에 동글동글한 얼굴 슬프고 조그만 그 눈으로 기억될 사람.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또 봐요. 나는 마음 속으로 가만히 되뇐다. 의사선생. 수고했어요. 항상 고마워요.



주위에서 이명으로 입원한 거냐고 묻는 이가 많은데 이명은 증상이지 병명이 아니랍니다. 어지럼증 역시 다양한 질병의 병적 증상일 뿐이죠.


저는 여러 어지럼증 중에

주위가 빙빙 도는 어지럼증

두통이 동반되는 어지럼증

양성 돌발성 두위 현훈증 당첨!


전체 인구 30%가 걸리고 60대 이상이면 두 명 중 한 명이라 하니. 뭐 먼저 맞는 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홀가분하네요. 재발도 빈번하고 나이 들수록 만성이 되기 쉽다는데 남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길벗 나와 같이 늙어가는 친구라 생각하기로.


ㅡ20대에 벌써 풍치가 찾아온 이력이라 이른 나이에 노인성 질환이 그리 두렵지는 않네요.


검진 결과를 받으면서부터 느끼는 게 하나 있다. 나이 들수록 부모의 질환을 고스란히 발현하는 몸뚱이. 무서울 유전자의 힘 바로 그것. 내 노년이 얼추 짐작이 간다. 어머니를 닮아 골다공증에 시달리겠구나. 아버지를 달마 풍치에 틀니를 끼게 되겠구나. 멀리 갈 것도 없다. 늙은 부모가 앓거나 걸린 질환이 내가 걸어갈 미래다.





도대체 감기몸살이 낫지 않는다 했다. 어제는 하루 종일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잠들었는데 간밤에는 치통까지 몰려와서 새벽에 서너 번 깼다. 목은 좀 가라앉는 듯싶었더니 이번엔 누런 콧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진다. 아스피린 따위로 가라앉을 게 아니었던가. 순간 고등학교 삼 년 내내 날 괴롭힌 축농증의 공포가 떠올랐다. 내가 대포생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 축농증 때문이라고 어이없는 변명으로 우기고 살았지만 설마. 머리에서 코 입 턱까지 온 얼굴을 두들겨 맞은 듯 격한 통증이 온다. 코에서 입에서 아니 온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것만 같다.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결국 부리나케 오늘 아침 병원행.


-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눈알이 빠질 거 같고 골이 우지근 흔들려요. 제 입이랑 코랑 몸에서 하수구 썩는 내가 나요. 아무리 칫솔질을 해도 냄새가 안 사라져요. 미치겠어요. 저한테 냄새 안 나요?

- 숨 크게 들이쉬세요. 숨 내쉬어 보세요. 아, 해보세요.

상태를 설명하고 급히 엑스레이. 급성 부비동염이란다.

- 헉! 이게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급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 안되는데. 할 일 너무 많은데. 알바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갈 데도 있는데 그런데.... 하늘이 노래지는 게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게 두통 때문인지 진단 때문인지 알 턱이 없다.


잘생기고 인자한 노의사왈 담담하고 졸린 어조로 단순 몸살감기가 어쩌다 가끔 방치하면 비염에서 부비동염까지 악화될 수 있다고. 급성 부비동염 환자 엑스레이 사진과 내 사진을 보여주며 친절하게 비교 분석까지. 한쪽 코만 염증이 왔고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닌데 그래도 병력을 감안해서 만성될 수 있으니 삼 주간 약 먹고 차도가 없으면 대학병원 가란다. CT 찍어봐야 한다고. 쳇!


처방한 약을 보니 맥시크란정. 페니실린계 항생제다. 세균 감염증에 사용한다. 아, 이건 결국 세균 감염이었어. 부비동에 자리한 내 백혈구들은 세균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여 고름이란 사체 누런 콧물을 선사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까닭 역시 지금 몸 전체에서 세포와 백혈구가 세균과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 일터. 코를 풀 때마다 매 순간 죽어 나자빠지는 세포를 생각한다. 미안하다. 너희들 힘으로는 이미 부족한 싸움이었는데 내가 미련했다.


항생제가 없었으면 난 어찌 되었을까나. 염증으로 생기는 고통에 절고 있었겠지. 심한 경우엔 합병증이나 패혈증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현대인의 평균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전부 약과 항생제 곧 의학의 발전 덕이다. 이게 아니었음 과거에 나같이 비실비실한 인간은 벌써 세상과는 안녕이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에게 머리 조아리며 감사를. 반년 간 정형외과 진통제 소염제에 위장약 항우울제 항생제까지 약에 배추처럼 푹 절여지고 있다. 이 배추맛이 굉장할 거야 암.



봄햇살 아래 어지럼증에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게 다 미세먼지 탓이라고 구시렁대는데 반바지를 입고 이어폰을 귀에 낀 이십 대 청년이 내 옆을 지나가고 벌써 반팔을 입은 아이가 저 멀리 뛰어간다.


아아, 남들 죄다 따뜻하다는데 나 혼자 겨울옷 껴입고 달달 떨며 기침하며 코를 풀어대는구나.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내 몰골이 하도 험상 맞은 지 약국 주인이 먹으라며 쌍화탕을 서비스한다. 고맙다고 뭐라 말하고 싶었는데 입을 벌릴 때마다 어금니가 쑤시고 아파서 발음이 제대로 안 나왔다. 제길 헐. 봄맞이하고는 정말 요란하다. 나로 말하면 잡병들의 호텔. 만성질환자. 온갖 잔병을 달고 사는구나. 액땜 참 거나하게 한다.


알레르기 비염, 축농증이나 양성돌발성 체위 현훈이나. 죄다 죽을병, 악성이 아닌 양성이라 죽지는 않는데 일상을 힘들고 귀찮게 괴롭히는 병. 사주에 온몸이 종합병원이라 몸에 칼을 많이 댄다 하더니. 온갖 잡병에 시달리다 죽을 팔자인가. 잘 죽어야 하는데 골골거리며 더럽게 오래 살겠군. 엄마가 그랬지. 요즘은 약이 좋아 잘 안 죽는 게 문제라고. 문득 그 말이 떠올라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오늘은 병원순례날. 이석증이 나으니 이번엔 코가 말썽.


어머니 간병하는 병원에서 24시간 상주하다 에어컨 바람에 재발한 알레르기 비염. 넉 달째 고생하다가 축농증이라 불리는 부비동염에 개고생 한 기억이 번쩍! 동시에 평생 알레르기 비염으로 고생하다 축농증 수술까지 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형제들 셋 중에 오직 나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비염. 너 당첨이요! 그래, 내 안에 아비 있다. 에잇, 몹쓸 유전의 숙명이라니 씨부렁 툴툴 대면서 부랴부랴 매번 들리는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다.


의사가 내 콧구멍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ㅡ어이쿠, 엄청 많이 헐었네요. 염증 때문에 힘드셨겠어요.

ㅡ네. 콧속이 띵띵 부어서 죽겠어요. 코가 막혀 잠잘 때 너무 답답해요.

ㅡ 이제 곧 환절기라 더 심해질 텐데. 잘 오셨네. 방치하면 부비동에 또 염증 생겨요.


의사는 간호사에게 '석션!'이라고 외치더니 기다란 호스를 내 콧구멍에 쿡! 쑤셔 넣었다. 흡입기는 슈슈슉 슈슈슉~~ 소리를 내더니 진공청소기처럼 콧구멍 속 코딱지를 단숨에 빨아들였다. 그제야 코가 뻥 뚫리는 기분. 코 세척 한 번에 날아갈 듯. 트래펑이 따로 없다.


이윽고 내놓은 의사의 처방이란.


ㅡ 절대 손가락으로 후벼 파지 마세요. 아시겠죠?


속이 뜨끔했다. 하하핫, 어떻게 알았지? 내가 세균 덩어리 손가락으로 허구한 날 콧속을 찔러대며 누런 코딱지를 후벼 파내는 걸~ 자면서도 파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파고 시도 때도 없이 파고 또 파고. 따갑고 쓰라려 죽겠는데도 포기가 안 되는 그 코딱지 후빔의 쾌감이란! 하지만 또다시 부비동염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겠노라.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유치원생처럼 코를 네버! 네버! 후벼 파지 않겠노라고 의사 선생에게 철석같이 다짐했다.


염증 가라앉히는 약과 연고 스프레이 처방. 상비약으로 코막힘 개선 슈다페드정, 항알레르기약 엘레틴 정, 하루에 한 번 콧속에 뿌리는 모타에 손푸로에이트 나조넥스 스프레이, 향균제 연고를 처방받았다. 연고는 면봉으로 손가락 사용 엄금!


때때로 의사란 직업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지고지순한가! 남의 더럽고 냄새나는 콧구멍을 날마다 날마다 들여다보는 직업이라니. 누런 고름이 낀 콧구멍 속을 휘저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부모 자식이라도 사랑하는 사이라도 상대의 콧구멍 속을 들여다보며 사랑하진 않으리라. 나는 염증에 고름이 찬 코딱지로 범벅이 된 내 콧구멍 속을 찬찬히 들여다봐주는 의사 선생에게 무한한 우주의 사랑을 느꼈다.


여하튼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 남의 귓속이나 콧구멍 안을 들여다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의사들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다. 매일 들여다보는 귓구멍 콧구멍이라니. 어이쿠! 상상만 해도 싫다. 나라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못할 일. 의사란 직업에 하늘 같은 존경심이 절로 우러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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