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로 수술한 지 21주 차. 5개월. 그 사이 계절은 바뀌고 달력은 넘어가고 2016 병신년이 되었다. 휠체어를 탈 때는 제발 다시 걷게만 해달라 소원했는데..... 그때는 오직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사람만 눈에 들어오더니 이제 멀쩡히 걷게 되니 뛰고 싶다. 세상이 그새 또 달라 보인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다. 간사하다.
여전히 오르막내리막이 쉽지 않다. 손잡이 난간 없이는 단번에 내려갈 수가 없다. 고통을 참고 쉼 없이 내딛으려 노력하지만 마음대로 안 된다. 멀쩡히 잘 걷다가 계단만 나오면 갑자기 절뚝거리는 절음발이 노인이 된다. 옆에서 누군가 그 모습을 봤더라면 난간에 지탱해 낑낑거리며 뭐라 혼자서 궁시렁 툴툴 욕을 해대는 여자가 보이겠지. 전철 계단을 힘겹게 내려가는데 그만 열차가 들어온다. 계단을 두세 칸 훌쩍 뛰어넘어 문이 닫히기 전 열차로 득달같이 한달음에 뛰어가는 이들을 넋놓고 지켜본다. 솔직히 부럽다.
난 아직 뛸 수 없다. 그 바람에 열차도 버스도 툭하면 놓친다. 하지만 열이 받거나 화가 나지는 않는다. 천천히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간다. 바쁠 일도 없는데 기다리지 뭐.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친다.
그 순간 어머니의 말이 귓가를 스친다.
'넌 말이야. 도대체 어려서부터 걸음이 느렸어. 부모가 안 보여도 천하태평이야. 아무리 빨리 오라고 해도 저 혼자 볼 거 다 보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애였다고.'
아아 그랬다. 어머니는 늙은 제 어미보다 느려터진 년이라고 불평하곤 했다. 문득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내가 놓친 인생, 인연, 기회가 얼마나 많았을까. 또 생각한다. 아니야. 천천히 간다고 느리게 산다고 삶을 놓치는 건 아니야. 난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것에만 그나마 남보다 빨랐다. 관심 없는 것 싫어하는 일은 때려도 맞아도 혼나도 게을렀다. 시켜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하다간 꼭 사고를 쳤다. 외골수 고집불통. 괜찮다. 에둘러 가도 어느새 지나가리라....이 또한 지나가리라.
2.
병원 재활에 너무 의지하지 말기로 스스로 자구책을 찾기로 결심. 동네 근처 체육관 헬스를 끊었다. 푸딩에서 이제 어묵으로 진화 중인 다리 근력 강화 스트레칭. 실내 자전거 타기. 한 시간씩 운동. 너무 오래 해도 무리다. 여전히 스쿼트는 다리가 후들후들. 힘에 부친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다. 이렇게 아픈 게 정상인가? 제길 헐. 다음 주 병원에 갈 때 의사에게 물어봐야지. 간사하다. 마음을 바꿨다.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다시 재활 치료사의 전문적 도움을 받기로.
3.
도시의 해거름녁. 해가 멀리 서녁으로 저물고 또 하루가 이렇게 간다.
목덜미가 움츠러드는 겨울이 오자마자 아뿔싸, 찾아온 친구. 편두통이 내 머리를 숙주로 삼고 놔주지 않는 요즘. 이것저것 일 때문에 분주히 밖을 돌아다니고 고작 이틀밤을 새벽에 잤을 뿐인데 체력이 금새 바닥났다. 수술 전과 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재활치료는 제자리걸음. 차들로 꽉 막힌 도로 한복판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갇혀있는 정체상태. 이제 내 무릎은 사고 전 다치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순 없을 텐데 그것은 삶 앞에 경거망동할 때마다 뒷덜미를 잡아주는 야경꾼, 앞으로 남은 생을 함께 걸어갈 길동무 친구로 삼으라는 말이다. 그 말이 그다지 슬프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고 편안해졌다. 생로병사는 삶의 순리일 터이고 그 중에 생을 경험하고 노를 향해 가는 길에 병은 친구일 것이니 죽음으로 가는 생에 그마저 벗 삼으면 덜 외로울 테니까.
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건강한 사람도 아닌 그 사이 애매한 경계에 서 있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환자가 건강한 사람들에게 다정해지려면 거의 성자가 되어야하는 것처럼 건강한 사람이 환자를 이해하려면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 어떤 시공간적 단절도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질병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픈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노인이다.
이제 나에게만 보이고 나만 느낄 수 있는 통증이 허락해준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발짝 떨어져서 사물을 사람을 상황을 보는 것이다. 아마도 에너지총량의 법칙에 비유할 수 있을 터인데 무한히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된 마당에 남은 에너지를 쓸 데 없는데 쏟아 부을 여력이 내게는 이제 없다는 자각. 상대가 원하는 관계가 아닌 내가 원하는 관계 내가 해야할 일에 집중해야한다는 결심. 무분별한 애정을 거둬들이고 방만한 관계를 선별 정리해야할 때라는 사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과 육체의 고통을 겪는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 어느 것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내가 쌓아 놓은 성안에 모든 에너지를 응축하는 것을 이기심이나 오만함 또는 무심함과 까칠함으로 볼 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을 소유할 수 없듯 우리 자신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 밖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였듯이 내가 내' 몸'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나는 차라리 질병에 '적응'하고 싶다. 이 말은 완치되어 '정상'이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상태를 인정하고 그 상황에 대해 명철한 시선을 던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질병을 일종의 사고나 일시적인 시련, 재수없는 불행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일종의 소명으로 여기는 것. 질병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래서 본성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바램이고 희망이다. 내 희망은 내 주의력 편에 서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달라져야하고 달라질 것이고 달라질 것이다.
이른 저녁식사를 끝내고 노을과 마주하면서 난 내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내가 또 다른 나와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4.
원래 사시사철 목욕탕을 좋아했지만 다친 후로 특히 겨울이 되니 목욕탕을 제 집 드나들 듯한다. 목욕탕 주인과 매점 아주머니와 세신사와 단골손님들이 웃으며 아는 체를 한다. 내 무릎 상태며 이것저것 물어본다. 그런데 매번 물어놓고도 까먹는지 똑같은 걸 또 묻는다. 웃기지만 나도 짐짓 처음인 것처럼 똑같이 대답한다. 불쑥 사적인 거 물어보고 참견하는 거 선 넘는 거 싫어하는데 이상하게도 이들의 오지랖만큼은 싫지 않다. 인정 많은 여자들 다정한 사람들이다.
날이 추우면 무릎이 더 뻐근해진다. 탕 속에서 마사지를 하면 통증도 가라앉고 뻣뻣해진 다리가 기름칠을 한 듯 부드러워진다. 더위보다 추위를 못 견디는 터라 한겨울만 되면 고역인데 바로 집 앞에 대중탕이 얼마나 고마운지. 윗풍 센 집에서 감질나는 샤워 따위를 하느니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가 푹 지지는 맛.
욕탕 수증기 속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 단어.
평화.
눈이 푹푹 내리는 한 겨울. 털에 고드름을 달고서 온천을 즐기는 일본원숭이의 표정. 무념무상. 가히 열반에 들었다. 나도 안다. 이 순간만큼은 네 맘이 내 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