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정직하다

by 홍재희 Hong Jaehee



전방십자인대 완파로 인대 재건술을 받고 반년 동안 재활 치료에 전념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끊어진 인대와 연골에 손상이 너무 심해 전부 긁어내고 타가건 그러니까 남의 인대로 전체를 이식해야 한다고 했다.


포탄이 떨어진 자리의 잔해처럼 너덜너덜해진 인대 사진이 기억에 생생하다. 한마디로 박살이 났다. 의사가 보여준 CT사진을 찍어 아이패드에 간직했더랬는데.... 미처 옮기지 못한 채 아이패드가 고장 났다. 사진을 날린 게 못내 아쉽다.


'와아.. 콜리 플라워! 활짝 핀 꽃봉오리 같네요! ‘


끊어졌다라기보다 터졌다, 폭발했다, 가 어울리는 파편만 남은 인대의 모습은 초현실적이었다. 수국을 닮았다. 꽃처럼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기왕이면 운동선수인 흑인 남성의 인대를 이식해 주세요.'

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때 날 제정신인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의사.

의사가 말하길

" 재건용 인대는 인종, 국경, 성별을 알 수 없습니다." 농담을 다큐로 받고 흥, 칫, 뽕!이다.


인대뿐만이 아니라 연골이 다 날아갔기 때문에 재활이 남보다 배는 더 걸렸다. '어리고 젊고 남성이면 회복도 빨랐겠지만 제 때 수술 시기를 놓쳐서 예후도 나쁘고 여자고 나이도 있기 때문에 환자분은 늙으면 무릎 관절염이 올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아프지 않으려면 악화되지 않으려면 이제는 운동 밖에 답이 없습니다'라고 의사는 암울한 소견을 내놓았다. 의학적 처치는 할 만큼 다 했으니 이제 환자 본인이 생활에서 조심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평소에도 이미 나쁜 자세로 골반이 틀어지고 허리가 휘고 어깨가 굽어 있었는데 무릎 수술로 다친 다리에 힘을 제대로 주지 못했더니 가뜩이나 나빴던 자세가 더 틀어졌다.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무릎은 여전히 아프고. 전체 몸의 균형이 다 깨졌다.


정형외과에 갔더니 살짝 척추측만과 만곡증, 디스크 초기 증세가 보이지만 역시나 아직 외과적으로 어떤 처치를 할 상태는 아니다고만 했다. 통증으로 견디기 힘들 때마다 매번 주사를 맞고 도수치료를 반복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돈은 돈대로 깨지고 통증이 사라졌다 다시 통증이 찾아오는 일상의 연속. 아파서 병원에 꼬라박는 돈이나 헬스장에 뿌리는 돈이나 그게 그거일 것 같았다.


결국 헬스장을 끊었다.


재활 P.T. 그렇게 헬스를 시작한 지 햇수로 5년. 사이사이 빼먹고 연기하고 사정이 생길 때마다 몇 달을 못 나간 적도 부지기수였기에 실제로 꾸준히 운동을 한 기간은 일이 년이 조금 넘을 것이다. 코치는 주 3회는 운동을 해야 한다 했지만 먹고사는 일에 촬영에 어머니 간병에 그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2회 그것도 안될 때는 1회. 어떡하든 시간을 내보려고 죽을 둥 살 똥 애를 썼다.


그 결과 작년 초 도수치료를 끝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정형외과를 가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1년 동안 병원 문턱을 밟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굽은 등이 빳빳하게 펴지고 목이 들리고 허리가 곧추서고 두 다리로 제대로 걷고 있다는 느낌이 이토록 신비롭고 놀라울 줄이야. 제대로 걷기만 해도 살, 아, 있, 다는 감각이 짜릿하게 느껴진다. 온몸에 뼛 속부터 피부로 세포 하나하나에 전율이 온다.


헬스 코치가 사진을 찍어 보여줬다.


보세요, 굽은 등이 많이 펴졌네요!


사진 속 내 뒷모습을 쳐다봤다. 이게 나인가? 운동 전과 운동 후. 놀라웠다. 이제껏 한 번도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남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바라보는 걸 좋아하면서, 모르는 이들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상상하고 사진 찍기를 즐겨하면서, 정작 내 뒷모습을 본 적은 없었기에. 예전부터 늘 그랬지만 헬스를 시작한 후로 더더욱 오가는 낯선 사람들의 뒷모습과 등, 그리고 걸음걸이를 유심히 지켜본다.


누구든지 간에 남의 뒷모습은 볼 수 있지만 제 뒷모습은 보지 못한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굽은 등은 그 사람이 짊어진 삶의 무게다. 그동안 나는 얼마만큼의 짐을 달고 살아왔던 것일까. 등을 펴고 어깨를 펴고 가슴을 펴고 이제는 가볍게 가볍게 살고 싶다.


비가 오고 장마가 길어지고 습하고 추우면 다쳤던 무릎에선 여전히 아프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그 통증은 내가 살아있다는 신호, 다쳤던 데를 잘 보살펴줘라는 목소리, 몸이 내게 보내는 대화다. 삶에 나이테가 있듯이 모든 통증과 병증은 삶의 흉터다. '살아있음'의 증거다. 바쁘게 살다 보면 한 때 내가 환자였다는 사실조차 망각하지만 한 번 아팠고 다쳤던 몸은 결코 잊지 않는다. 잊을 만하면 몸은 내게 대화를 시도한다. 고마운 몸이다.


인생은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고, 사람 관계는 뜻대로 되지 않고, 일도 기대한 만큼 보답받지 않지만 노력한 만큼 결과가 보상으로 온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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