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질병과 사고는 흔적을 남긴다

by 홍재희 Hong Jaehee



몸이 찌뿌둥하길래 목욕탕에 갔다. 이런 날씨에는 뜨뜻한 탕에서 푹~ 지지는 게 최고다.



2015년 여름. 사고로 수술을 한 지가 벌써 햇수로 9년 전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재활훈련도 운동도 빠지지 않고 다 했다. 지금은 쪼그려 앉기 뜀뛰기 달리기 한 발로 서기 다 할 수 있다. 외관상 지극히 정상이다.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습하고 덥고 비 오는 날씨, 춥고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간절기에는 수술한 무릎이 신호를 보낸다. 다쳤던 다리에서 어떤 느낌이 신경을 타고 올라온다. 뻑뻑하고 둔탁하며 지릿지릿한 그 느낌.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는 카메라 렌즈링처럼. 불쾌하고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다리를 타고 기어올라온다. 희한한 일이다. 평소에는 사고나 수술 자체를 망각하고 살다가 이런 날에는 몸이 잊었던 기억을 저절로 불러온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사실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산다는 것은 다치고 아프고 병나고 병든다는 것. 평소에는 살아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다가도 누구나 통증에 시달리고 고통을 느끼면, 아프면 알게 된다. 아, 나 살아있구나! 어쩌면 통증이나 고통 그리고 상처를 통해, 우리는 살, 아, 있, 다,는 것을 겸허히 깨닫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저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와 뼈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지상에서의 삶, 이생에서 우리의 영혼은 육체라는 집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몸이 곧 나고 내가 곧 몸이다. 내 몸이 전하는 이야기에 찬찬히 귀를 기울일 것. 이 생을 사는 동안 내가 잠시 살다가 머물다가 떠날, 이 몸이라는 집을 그 누구보다 아끼고 돌보고 사랑할 것.






지난 일기를 들추어 본다.

그 해 여름의 한 자락. 일기는 어김없이 같은 내용이다.

언제나 무릎, 다리, 통증, 수술에 대한 기억.



2017년. 6월 26일.



어제 다친 곳이 또다시 뻐근하니 찌릿찌릿 쑤석거렸다. 걸어가는데 자꾸 다리에 힘이 빠지고 고꾸라질 듯해서 약국 들려 파스 하나를 사서 덕지덕지 붙였다. 왜 이러지.... 날씨는 화창하니 덥기까지 한데. 혼자 구시렁구시렁 투덜대고 말았는데 오늘 하늘을 올려다 보고서야 아하! 머리를 쳤다. 그렇구나. 날이 흐리고 비가 오려는구나.


어릴 적 TV나 영화에서 할머니들이 연로한 어머니가 애야 비 오려나보다 빨래 걷어라 할 때 정말 신기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맑기만 한데 뭐가 비가 온다는 거야.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너무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더랬지. 할머니는 엄마는 비올 걸 어찌 알았을까. 신통방통한 그 예지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도 그 비밀을 안다.



다친 후부터 생긴 증상. 정확하게 흐린 날 비 오기 전날 쑤시고 저리고 아프다. 흐흠~~~ 이제 나도 그 신통한 예지력이 생겼다. 내가 맑은 하늘을 보고 내일은 날이 굳겠어 비가 오겠어하면 그 말을 믿어보시라. 틀림없다.





2016. 6월 25일.



지난주부터 상태가 안 좋더니만 며칠 전부터 살짝 무릎이 아프더니 비가 오겠다 싶었다. 습하고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통증이 찾아온다. 다음 달이면 사고 난 지 꼭 일 년이 된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재활 치료에 재활 PT, 웨이트까지, 운동도 꾸준히 했지만 이제 다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완치는 불가능한 게 이런 사고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말했다. 이제 한 50% 올라왔네요. 전문 운동선수가 아닌 한 평범한 일반 환자는 대개 70% 정도 회복된다고 백 퍼센트 완치란 불가능하다 했다. 살찌고 뚱뚱해지면 무릎에 하중이 가고, 그러면 나이 들어 반드시 퇴행성 관절염이 온다고, 그러니 체중관리를 잘하라고 겁을 준 의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맴 돈다. 수술은 대단히 성공적이고 환자분에게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이제 앞으로는 본인에게 달려있어요. 매일 스퀴트 오십 개 스쿼트 오십 개. 하체 다리 근육으로 버티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무릎 상태가 더 나아지는 방법은 오로지 운동뿐이라 의사는 매일 스쿼트 오십 개를 하라고 주문했다.



초기에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다. 하지만 작심삼일. 언감생심. 운동이란 어떤 핑계로든 한 번 쉬게 되면 계속 쉬게 된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습관이 붙지 않는다. 요리조리 게으름과 귀차니즘에 지고 운동을 쉬다가 무릎이 시큰거리고 통증이 와야만 아차! 덜컥 겁이 나서 부랴부랴 헬스장으로 향한다. 운동을 해도 나아질 거 같지 않으면 다른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 한의원으로 정형외과로 달려간다. 의사의 소견을 듣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X-레이 사진 속 정강이에 선연하게 박혀있는 네 개의 나사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는 몸뚱이에 나사 또는 못을 박고 사는 인간이로구나. 죽음에서 부활한 나자로의 기적이 여기 있다. 백여 년 전 태어났다면 사고 후 살아나도 절음발이로 평생 살았을 터. 현대 의학은 나 같은 이도 걸을 수 있게 했다. 바로 의술의 경이로운 힘이다.






며칠 전 작년에 똑같은 수술을 받고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다가 가까워진 한 환자에게 전화가 왔다. 청주 사는 그이는 작년 퇴원 후부터 내게 꾸준히 연락한다. 우리는 통원할 때마다 만났고 그는 우리 집에서 묵고 갔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 주제는 늘 서로의 상태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 안다. 동병상련.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아도 어떤 감정인지 어떤 통증인지 어떤 상태인지 그냥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할 필요도 없다. 그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길 상태가 나빠졌다 했다. 수술 직후 재활 상태로 돌아갔다고 연골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악화되었다고. 운동도 당분간 절대 금지라며 웃는데 그 웃음이 정말 좋아서 웃는 게 아님을 난 누구보다 잘 안다. 이제 겨우 스물여섯 살인 그에게, 운동을 사랑하고 스포츠를 사랑하는 그에게, 바다낚시를 좋아하고 크로스핏이라는 격한 운동을 즐겼던 그에게 닥친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스물여섯 해를 살던 나는 뭘 했더라? 나는 음주가무로 날밤을 새며 클럽에서 방방 뛰고 헤드뱅잉을 해대고 있었는데. 튼튼한 두 다리로 사정없이 무대를 누비면서. 그러고 보니 다리가 고장 난 후로 춤도 춤이거니와 술도 예전처럼 마실 수 없다. 맥주와 와인 같은 술을 과음하면 다음날 어김없이 무릎이 부어오르고 뻑뻑해진다. 상태가 더 나빠진다는 건 아니다. 다만 뭔가 불편해진다는 것.



지난달부터 병원에 안 갔다. 바쁘다는 핑계와 돈이 없어서. 걷는데 지장 없으니 안 가도 되겠다 싶었다. 여전히 양쪽 다리는 짝다리. 걸을 때 무릎이 뻣뻣하고 계단을 내려갈 때 욱신욱신 찌릿찌릿하다. 기름칠을 안 해서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자전거 바퀴가 내 다리인 듯. 외관상 멀쩡해 보여도 자신만 느끼는 통증을 달고 사는 사이비 환자가 바로 이런 거다.



질병이든 사고든 한 번 지나가면 흔적을 남긴다.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잊을 수는 있어도 사라지진 않는다. 언제든지 귀환한다. 통증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실이 더 힘들거나 더 우울하거나 더 괴로운 건 아니다. 체념이나 절망과도 다르다. 이건 일기예보 같은 거다. 아프니 조만간 비가 오겠구나 아프니 조심해야구나 아프니 쉬어야겠구나.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한 지렛대로 삼을 수 있으며 절제의 산 지혜를 얻은 것일 수도 있다. 그저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된다. 죽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이 흔적을 앞으로 친구로 삼을 수 있을지 적으로 돌릴지는 온전히 내 몫이다.



ㅡ 오늘은 운동을 하러 가야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