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수 년 만에 누군가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카페에서 옆 자리에 앉아있는 그가 놀랍게도 A였다. 반가움에 아는 척을 했지만 곧 내가 한 짓을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교수 직함을 달고 있는 A는 그 세월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 상황을 대충 들어 알고 있는 내게 또다시 학교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변함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들어보니 조직 내에서 그 혼자만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인 듯싶었다.
'이상한 인간들이야. 수준 미달에 상스러워. 제대로 된 학위도 없는 주제에 어디서......'
다른 교수들과 동료들에 대한 비난과 험담이 계속되었다. '수준, 학위' 등등 단어가 귀에 거슬렸지만 얼마나 답답하면 속상하면 그럴까 싶어 성심껏 들으려 애썼다.
학교에 자리 잡은 후 학교 안에서만 살아온 그는 학교 이야기 밖에 할 줄 몰랐다. 그것도 오직 교수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암투와 부패에 대해. 뇌물 먹는 교수들에 대하여, 학생들을 제 노비로 부려먹는 교수들에 대하여, 심지어 열정 페이조차 주지 않고 공부라는 명목으로 갈취하는 교수들에 대하여, 제들끼리 짬짜미를 먹고 거기 끼지 않는 자를 왕따 시키는 교수 패거리들에 대하여, 학문라는 간판을 내걸고 시정잡배 같은 짓거리를 일삼는 장사치들에 대하여. 양식과 학식은커녕 부도덕과 비양심으로 얼룩진 교수나부랭이들을 성토하다가 그런 후진 인간들을 교수라고 선생으로 모시는 학생들만 불쌍하다고 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분노가 치미는 일이었다. 사기꾼 모리배 소굴 같은 곳에서 독야청청하는 그가 얼마나 외로울지 짐작이 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흐트러지고 공기가 불편해졌다. 급기야 더 듣기가 버거워서 다른 주제로 슬쩍 말을 돌렸다. 강의 없는 평소에는 무얼 하냐고 물었다. 그는 그냥 집에 있다 했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인간들이 꼴 보기 싫어 강의 외에는 학교에 나가지 않는다 했다. 학교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했다. 그다음에 뭐라고 맞장구를 치든 말을 이어나가야 했는데 딱히 떠오른 말이 없었다. 그러자 그 짧은 침묵을 깨고 그가 다시 학교 말을 꺼냈다. 결국 대화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차라리 때려치우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좋아요. 그렇게 싫다면 힘들면 차라리 그만두는 게 어때요?'
'뭐? 네 일 아니라고 참 속 편하게 말하는구나.'
그가 말문을 닫았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문득 공포영화 <숲 속 오두막(Cabin in the woods)>가 생각났다. 대화는 안간힘을 써도 탈출할 수 없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실드가 처진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진 것만 같았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 문제를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라 했더니 일이 그렇게 단순하면 자기가 왜 스트레스를 받겠냐고 반문한다. 오늘 당장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는 어차피 지금 고민한들 풀리지 않는다 내일 또 고민하라 했더니 너처럼 긍정적이면 차암 좋겠단다 세상 사는 데 아무 문제없겠단다.
욱.... 할 뻔했다. 이 사람은 정말 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내가 얼마나 세상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인간인가를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자기 긍정이 지나쳐 자기 비하와 자기기만을 오르내리는 긍정 과잉 시대에 비관적 자아도취자와 낙관적 회의주의자를 구별하지도 못하니.
그가 매일 겪는 스트레스를 제삼자인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감히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 그저 그가 겪는 고충을 헤아리고 그의 마음을 다독이며 그 편을 들어주는 게 내 몫이겠지. 하지만 자신은 한 점 부끄럼 없이 깨끗하며 남들은 전부 더럽다는 그의 견해에 왜 그런지는 몰라도 전적으로 동의해 줄 수가 없었다. 모든 걸 부정으로 시작해 부정으로 끝내는 그 사람을 꼬일 대로 꼬여 말꼬리를 잡는 그를 더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 그와 내가 함께 나눌 수 있는 현재는 미래는 하나도 없었다. 이게 다였다.
그는 더 떠들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재주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으면 심야 버스 타면 된다는 그에게, 넌 집도 가까우니 택시 타면 되지 않냐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사실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2차라도 가야 했겠지만 그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기는 더더욱 싫었다.
2.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했다. 명치끝이 아득해지더니 참았던 피로가 몰려왔다. 나이 탓인가. 정의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 세상에 정의롭지만 속좁고 나약한 사람을 대하는 것 역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진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에게 자기애만 남아있는 사람에게 쏟을 에너지가 내겐 남아 있지 않다. 지친다. 남의 허물을 보느라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을 되도록 멀리하고 싶다. 성실하며 책임감도 강하지만 흑백논리와 같은 유아적인 세계관을 고수하는 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없다. 나이 든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서글픈 일이다. 문득 두렵다. 나 또한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타인에게 가혹한 인간이지 않은가. 정작 나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가. 나는 정말 잘 살고 있는가. 제대로 나이 먹고 있는가. 되돌아본다.
잠시 쉬어가고 싶었다.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뭔가 진득진득한 찌꺼기가 몸에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모조리 떨어내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는 체할 필요 없는 낯선 곳에서 오로지 술과 독대하고픈 마음. 혼자 바에 앉아 있고 싶었다.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나 역시 대답할 필요 없이 술만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 술을 마신다고 스트레스가 해소되진 않는다는 걸. 애써 술집을 외면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문을 열고 자리에 누워서야 안도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3.
그날 밤. 이십 대 청춘에 만났던 B와 섹스하는 꿈을 꾸었다. 거기가 어딘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 집이거나 누군가 집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사람들이 오고 갔다. 주변의 시선을 피해 아니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그러고 보니 사람들 역시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어쨌든 우리는 섹스를 하려고 용을 썼다. 꿈속에서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간 생각조차 한 번도 나지 않았던 이 사람과 이 마당에 여기서 갑자기 섹스를 하고 있는 이유가 도대체 뭐지?' 사랑이라는 감정도 남아 있지 않는 미련 한 점 없이 스쳐 지나갔던 옛 인연인 그를 하필 그 사람을. 무슨 까닭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은 섹스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불가능했다는 거다. 그와 나는 서로 다른 더듬이로 상대의 몸을 이리저리 찔러대는 사마귀, 둘 다 눈뜬장님들 같았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자세를 바꿔가며 별짓을 다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몸과 마음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점점 유리되고 있었다. 슬슬 짜증이 신물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불만이 곪고 곪아 터져서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이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거기에는 상황이 어서 종료되기만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내가 있었다. 입에서 '그만해'라는 말을 꺼내려는데 꿈에서 깨어났다. 순간 '지리멸렬' 네 글자가 귓가에 맴맴 돌았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하기를. 왜 이런 황당한 꿈을 꿨는지를.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불능이자 불통이었다. 지난밤 A를 만난 자리가 꽤나 스트레스였긴 했나 보다고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