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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의 신세계

by 홍재희 Hong Jaehee

어머니는 당신이 사시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다육식물과 선인장을 가꾸고 돌본다. 베렌다가 좁다보니 대개는 조그맣고 앙징맞은 화분들이다. 그 중엔 수년만에 꽃을 피운 선인장도 있다. 어머니는 종종 아파트 화단이나 분리수거 장소에 버려진 화분을 주워 와서 물을 주고 가꾼다. 평생 남을 돌보고 가족을 돌보고 살아온 어머니는 누군가 내버리고 간 선인장 하나도 살리는 고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 생명을 살리는 살림에 솜씨가 빼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어머니를 요만큼도 닮지 않은 거 같다.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엔 2층 양옥 단독주택 1층에 세 들어 살았다. 마당에 꽃밭이 있어서 화분을 사서 옹기종기 늘어놓고 허브와 이런저런 관상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율마 레몬밤 애플민트 페퍼민트 로즈메리 파슬리 바질 등등 잔뜩 욕심을 냈다. 다들 여름 한철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요리할 때마다 한 줌씩 뜯어 재료로 쓰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겨울 동안 배낭 메고 여행을 떠나며 장기간 집을 비웠고, 식물들을 전부 죽이기 일쑤였다. 겨우내 말라죽고 얼어 죽은 화초를 보는 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듯 죄책감마저 들었다.

반려동물을 포함해서 식물까지도 날마다 정성으로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떠올랐다. 구속받고 간섭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면, 신경 쓰는 것이 뭣보다 귀찮고, 소유욕과 애착이 불편한 사람, 툭하면 집을 비우고 제 멋대로 자유롭게 오고 가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은 무언가 마음을 주고 돌볼 대상을 곁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더 나이들고 늙으면 모를까. 아직까지는 정 줄 대상이 없는 게 마음 편하다. 여기로 이사 온 후에 내 가 식물 키우기에도 부적합한 사람, 구속보다 자유를 더 사랑하는 사람, 금손이 아니라 똥손이라는 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허브를 직접 키우는 대신 요리할 때마다 일일이 사 먹자니 나가는 돈이 너무 아까웠다. 주머니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 생 허브를 사다 먹는 건 즐거운 호사지만 사치다. 요즘은 비싼 허브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토종 나물에 눈이 더 간다. 어차피 서양의 허브가 한국에선 나물이다. 봄이면 지천에 흔한 게 나물인데 뭐 굳이 몸값 비싼 허브까지야.​


방방곡곡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나물 천국이다. 사시사철 철마다 나물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봄은 나물의 왕중왕 계절. 봄철 시장에 가면 온갖 봄나물이 저마다 경쟁하듯 각양각색으로 싱그러운 빛을 발한다.


제철 나물을 데치고 무쳐 먹는 맛 상큼한 그 맛.

3월에는 머위와 방풍나물로 원 없이 풍성한 식탁을 차렸다. 4월에는 모처럼 두릅을 사고 싶었지만 비싸서 잠시 고민하다 다음 기회로. 시장에서 참나물과 취나물이 할인해서 각각 한 봉지에 천 5백 원이다. 싸다. 두부 한 모 천 5백 원. 레몬 여섯 개 5천 원. 양배추 반 통에 2천5백 원. 비싸지만 샀다. 다 사도 만 원이 안 넘었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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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주 째 집밥을 해 먹다 보니 입이 너무 심심했다.

단호박 두 개로 호박죽을 쑤었다. 살짝 소금간만 해도 맛있다.

돌나물 반으로 무침을 하고 나머지는 샐러드를 만들었다.


두부를 데쳐 곱게 으깬 후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해놓고 대파 흰 부분을 곱게 썰어 넣는다. 돌나물이 푸릇푸릇하니 두부와 대파의 흰색이 더 맛있게 색감이 어울린다. 샐러드에는 흑임자 소스를 만들면 좋겠지만 없으니 없는 대로 올리브유와 레몬 팍팍 짜서 넣고 생올리브 올리고 라코타 치즈나 스모크 치즈를 뿌리면 더 좋았겠지만 없으니까 한 장 남은 체다 슬라이스 치즈를 부셔 뿌린다. 무침은 매실청과 식초 마늘 고추장으로 소스를 만든다. 먹다 남아 말아 비틀어진 사과와 배도 종종 썰어 넣는다. 똑같으면 재미없으니까 참나물은 된장과 들깻가루로 무침을 만들었다.


토종 나물로 무친 한식 무침과 양식 샐러드의 궁합이 나쁘지 않다.

이제 며칠은 요리 안 해도 끼니 걱정 반찬 걱정 없다. 재활용 만세!


그 사람이 먹는 밥상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우치고 있다. 간편해서 샐러드야 늘 해 먹었지만 내 손으로 나물을 데치고 무쳐먹고 볶아 먹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제는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철마다 새로 들어온 나물이 살포시 눈에 들어온다. 나이 들고 있다는 늙어간다는 증거인 듯싶다.



어릴 적엔 반찬에 파만 들어가도 족족 골라내서 어머니께 매번 야단을 맞았다. 그만큼 먹기 싫었다. 그런데 나이 드니 역시나. 파가 점점 더 좋아진다. 하지만 파김치는 여전히 싫다. 아마도 내가 파김치를 좋아할 때면 머리가 파뿌리처럼 허옇게 새어버린 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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