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간만에 시장에서 장을 봐서 냉장고 안을 채소로 가득 채웠다. 유채나물, 깻잎순이 천 오백 원이라 각각 한 봉지, 큰 무 하나도 천오백 원 쌈채소도 이천 원 어치를 샀다. 싸다.
내가 시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까닭은 싼 값에 풍성하게 풀떼기를 먹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겨울에 집에서 푸릇푸릇한 채소를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가. 희한하게도 나는 냉장고 안이 풀떼기로 가득 차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온갖 채소가 가득 찬 채소칸을 들여다볼 때마다 적금이라도 든 것처럼 흡족해진다. 행복하다.
유채나물로 겉절이도 하고 무침도 하고. 무로는 뭘 할까. 무 호박 들깨무침을 하고 콩나물뭇국도 끊이고 밥에도 무를 썰어 넣어 무밥도 한다. 재료를 남김없이 다 소진했다. 오래간만에 반찬 부자가 되겠다. 시장에서 사는 음식 재료는 혼자 먹기엔 늘 양이 넘친다. 버리는 게 더 많아서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묘수가 늘었다. 똑같은 재료로 한 번에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나 반찬을 찾으면 된다.
유채나물과 쌈채소로 아점으로 먹을 두부 샐러드를 만들었다.
두부를 네모나게 잘게 썰어 물기를 쪽 빼고 편을 썰은 마늘쪽과 같이 프라이팬에 굽는다. 여기다 토마토와 채 썬 당근을 넣고 같이 올리브유에 살짝 볶는다. 토마토 몇 개는 으깨서 두부 위에 뿌려주면 두부에 토마토 과즙이 배어들어 더 맛이 좋아진다. 거기에 소금을 살살 뿌려주면 끝. 다음은 샐러드 소스를 만들 차례. 마늘 까서 으깨놓고, 거기에 올리브 오일과 간장 그리고 참기름을 넣는다. 통후추 갈아 송송 뿌려주고 꿀을 한 큰 술 넣어 다 같이 잘 섞어준다. 마지막으로 샐러드볼에 두부와 토마토 볶은 걸 가지런히 담고 삶아놓은 메추리알도 올린다. 그 위에 먹기 좋게 썰어 놓은 쌈채소를 예쁘게 올려주고 나서 만든 소스를 쓰윽 둘러주면 끝.
유튜브에서 본 레시피인데 한 끼 식사로 그만이다. 풀떼기 따위로 무슨 끼니가 되냐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두부 한 모에 메추리알과 신선한 채소까지 먹고 나면 포만감이 차고 넘친다. 곁들여서 견과를 넣은 두유 과일 퓌레 한 그릇까지. 몸 안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깨끗해지는 느낌. 건강해지는 맛이다. 해보세요들.
2.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집밥 먹는 풍경이 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밥 먹는 장면이다. 주방에서 식탁도 아니고 싱크대 냉장고 옆에 서서 밥그릇 들고 허겁지겁 먹는 것. 그리고 밥상에 달랑 밥과 김치. 김치 쪼가리에 물 말아 맨밥 먹는 것. (김치 하나만 있으면 밥 먹을 수 있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생각만 해도 우울해진다. 슬프다. 무얼 어디서 어떻게 먹고 있는가에 따라 밥상 하나에도 자존감이 높아지거나 낮아지기도 하고 자괴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내게 집밥은 단지 허기를 달래는 요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집밥이란 제대로 잘해 먹는 밥이다. 집밥을 먹을 땐 채식과 콩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고 먹을거리에 관심을 쏟는 한편 상차림에도 신경 쓴다. 기왕이면 보기 좋은 게 먹을 맛도 나는 법. 별로 대단할 거 없는 한 끼 밥상이라도 일부러 테이블 매트도 깔고 반찬도 접시에 덜어서 보기 좋게 담아낸다.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사진도 찍어 올리기도 한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어서라기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또는 정갈한 의식 같은 것이다. 잘 차린 밥상 앞에서 내가 날 잘 돌보고 있구나 뿌듯해하며 오늘도 한 끼를 제대로 잘 먹었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앞으로도 나를 더 잘 돌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밥상을 차린 보람이 있다.
- 네, 제게 집밥은 엄마가 해준 밥이 아니라 집에서 잘해 먹는 밥입니다.
3.
집밥을 먹으니 오늘은 꼭 휴일 같다. 프리랜서의 이점이 있다면 이렇게 아침나절 느긋하게 집밥을 해 먹을 수 있다는 게 아닐까.
프리랜서라면 대개 비슷하겠지만 나는 혼밥에 아주 익숙하다. 혼자 일을 하거나 집에 있는 시간이 직장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으니 집에 있을 때는 되도록 집밥을 해 먹으려고 노력한다. 종일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날은 어쩔 수 없지만 집에 있는 날이면 적어도 하루 한 끼는 꼭 집에서 해 먹는다. 그것도 잘 차려먹는다. 대단한 요리실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잘하지도 않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밥상이라도 정성 들여 차린다.
뭘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서 먹으면 무슨 맛이냐며 집에서는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 스스로 해 먹기 싫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집밥 해줄 엄마를 그리워하며 귀차니즘에 빠져 이불속에서 미적거릴 시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여는 게 차라리 낫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향한다.
친구들이나 주변에서는 장바구니를 들고 수레를 끌고 시장으로 장을 보러 다니는 날더러 뭣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고, 마켓 컬리나 쿠팡에서 배달시키지 뭣하러 발품을 팔며 무거운 짐을 들며 장을 보느냐 한다.
내가 청과물과 식재료를 쿠팡과 같은 온라인에서 사지 않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별 게 없다.
주말 빼고는 장 볼 시간 내기도 엄두가 안나는 바쁜 직장인도 아닌데 굳이 총알 배송료를 내면서까지 주문 을 해야 할 이유가 없고,
배송된 물건에서 나오는 비닐이나 포장재 같은 일회용 쓰레기를 양산하는 게 진짜 싫기 때문이다.
일단 시장은 이마트나 롯데마트와 같은 대형 마트에비해 턱없이 값이 싸다. 때때로 마감 시간에 가면 에누리나 떨이도 가능하다. 주머니가 가벼울 때 시장은 돈 많은 손님이나 돈 없는 손님이나 차별없이 환영한다.
뭣보다 하늘이 보이는 시장에서, 마트에서, 청과물 가게에서, 사람 냄새나는 장소에서 장 보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놓치기 싫다.
삶이 살아 펄떡이는 시장 특유의 분위기, 오늘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바라보며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받는다.
생활용품은 다이소를 이용하고 그 밖에 필요한 공산품이나 치즈, 올리브와 같은 수입 식재료를 살 때는 대형 마트를 가지만 평소에는 늘 동네 시장에서 장 보는 게 내 일과다.
호주 멜번 친구집에 머물고 있을 때도 주말마다 늘 빅토리아 마켓에 트롤리를 끌고 장을 보러 갔었다.
박토리아 마켓에서 지역 농부들이 직접 기른 청과물과 어부들이 잡은 생선, 그리고 육류를 장 마감 시간에 가서 떨이로 푸짐하게 산다.
손수레에 일주일치 식재료를 한가득 물건을 사서 쟁여 놓고, 시장 입구에 늘어서 있는 조그만 모퉁이 노천카페에 앉아 삼천 원 짜리 카푸치노를 시켜놓고 주말 오후를 즐긴다.
급할 게 뭐 있나. 서두를 필요 없다. 쉬어가는 하루를 만끽하는 찰나.
햇살이 내리쬐는 토요일 오후, 갈매기가 날아가는 하늘 아래, 붉게 물드는 멜번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시간이 흘러가고, 집에 돌아가 오늘은 또 무엇을 해 먹을까를 궁리하는 순간.
아아 좋다. 행복이 별 건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지.
그때 친구가 그랬다.
- 나 예전엔 잘 몰랐는데. 장 보는 거 참 재밌네. 언니 덕분에.
노동에 지쳐 바빠서 귀찮아서 피곤해서 집에서 요리를 해 먹지 않고 늘 피자와 라면 같은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친구를 위해, 멜번에 머무는 동안 나는 우렁각시처럼 친구를 위해 매일 요리를 했었다.
책을 쓸 수 있는 공간을, 한국에서 철새처럼 날아온 나에게 편안히 머물 곳을 제공해 준 친구에게,
자신의 집을 기꺼이 내어주고, 친절과 환대로 문을 열어준 벗에게,
멜번 구석구석을 느끼고 좋아하고 사랑할 시간을 선사해 준 그에게,
내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도록 해주고 싶었다.
4.
폭식 과식 야식해도 끄떡없고 대충 먹고 밤샘을 밥먹듯이 해도 거뜬한 체력은 20대를 정점으로 찍고 30대가 지나면 점점 바닥을 치기 시작한다. 20대는 밥 대신 김밥 아니면 라면과 케이크 조각과 커피 따위로 끼니를 때워도 거뜬했다. 쫄쫄 굶다가 첫 끼를 오밤중에 먹어도 힘들지 않았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데워 먹거나 뭐든 최대한 빠르고 간편하게 간단히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불규칙한 식생활과 수면시간 들쑥날쑥한 일상으로는 오래 못 버틴다. 젊다고 자신한들 식습관이 개판이면 결국 사달이 난다. 젊음은 한철이다. 젊다고 자신한 건강, 젊음으로 지탱한 건강조차 식생활이 엉망이면 곧바로 무너진다. 위장 장애에 하도 시달려봐서 그런지 제대로 먹지 않으면 몸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너무 잘 안다.
나는 호되게 병치레를 하고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면서 밥상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꿨다.
스스로를 잘 먹이고 잘 돌보는 일이 가장 최우선이다. 자신은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돌보기만 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육체적 건강을 잘 지켜야 그 몸에 깃든 마음을 정성스레 돌볼 수 있다. 마음을 잘 돌보려면 신경 써서 밥을 먹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길은 바로 스스로를 잘 먹이고 돌보는 것이다.
누구들 그렇지 않겠냐만 프리랜서로 사는 사람일수록 더 잘 먹고 챙기고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연령 성별 불문하고 혼자 사는 1인 가구일수록 자기 돌봄이 몸에 배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챙겨주길 기대하기 전에 스스로 부지런할 것. 귀찮다고 끼니를 건너뛰고 아무거나 먹고 때우고 굶지 말 것. 배달음식과 편의점 김밥 도시락으로 살지 말 것. 제 몸에 쓰레기를 집어넣으며 몸을 쓰레기장으로 만들며 살지 말 것.
잘 먹는다는 건 단순히 비싸고 맛있는 걸 많이 먹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잘 먹고살기. 실은 돈 버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제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스스로를 아끼고 돌보지 않아 병을 얻는 경우도 많이 봤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으로 스스로를 제대로 먹이고 잘 돌보지 않으면 몸이 망가진다. 몸이 망가지면 정신이 아무리 강한 들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 정신도 결국 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정신은 몸을 숙주 삼아 살고 있는 것과 같다. 육신은 영혼이 깃든 집이다. 제 집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집이 무너지고 나면 갈 곳이 없다. 마지막 갈 곳은 저 세상뿐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에게 유익한 공생관계가 되려면 내가 살고 나를 살리고 내가 살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해 주는 이 몸을, 나를 살게 하는 육신을, 세상 떠나기 전까지 잘 사용하다 가는 게,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살아있는 동안 주어진 삶과 생명에 대한 도리다 싶다.
사실 자신을 돌보는 일상의 진리는 아주 단순하다.
"좋은 거 먹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몸에 나쁜 거나 먹지 마.
돈 모으려 애쓰지 말고 쓸데없는 거나 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