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댁에 들렸다. 어머니와 함께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마침 요양 보호사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2시간 집을 방문하여 어머니를 돌봐주시는, 60대 후반 여성분이다. 혼자 힘으로 아들 둘을 키우고, 평생 손에서 일을 놓아본 적이 없는,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노동자, 자신의 이름 석자로 세상 풍파와 싸워온 강인한 여성. 이 분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재밌다.
보호사왈, 혼자 있으면 잘 안 차려 먹게 된다. 밥 차리기 귀찮아서 대충 있는 거로 때우신다고. 혼자 사는 너도 그렇지 않냐는, 내게 무언의 동의를 구하는, 질문 아닌 질문. 맞아 맞아. 혼자 있는데 뭘 해 먹어. 무슨 맛으로. 보호사의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셨다.
어머니나 요양보호사나 둘 다 평생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 분들이다. 두 분 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사별을 하건 이혼을 하건, 늙어서 홀로 되었을지언정, 혼자 살고 싶어서, 살겠노라 다짐한 적은 없었다. 일평생 가정을 꾸리고 가정을 지키고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여자들.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는 여자들. 자신을 돌보고 아끼고 사랑하기보다 가족을 자식을 위해 제 한 몸을 남김없이 희생한 이 여자들. 이 여성들은 자식이 없고 가족이 없는 시간을 살아본 적이 없다. 따라서 혼자서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자신과 함께 사는 법을 모른다.
어머니나 요양보호사는 혼자 사는 사람은 못 챙겨 먹는다라는 고정관념이 머리에 박혀있다. 두 사람 다 자신이 그렇게 때문에 남도 그럴 것이다 지레짐작한다. 어머니는 밥 숟가락 뜨지도 못하던 갓난애도 아니고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닌 나를, 이제 나이들만큼 들어버린 내가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고 있을까를 지금도 걱정한다. (어머니의 가이없는 사랑이라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 술 더 떠 '혼자' 사니까 당연히(!) 잘 안 챙겨 먹어서 그래서 내가 말랐다!라고 간주하는 요양보호사. 어머나, 난 살이 뒤룩뒤룩 배가 출렁출렁 나와서 죽겠는데. 아가씨처럼 날씬해서 좋겠다. 뭐든 꽝꽝 잘 먹어야지. 일 한다고 잘 안 먹고 다니니까 그런 거 아냐?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야, 밥. 이 분은 날 볼 때마다 훈수를 두신다. (나이 들수록 끼니 거르고 아무거나 먹으면 건강도 해치고 그러면 살만 더 찐다고 말해드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남편과 자식, 가족을 위해 반평생 밥을 차리고 치우고 차리고 치우며 살았던 이 여성들. 가족에게는 제 한 몸을 불살라 먹이고 입고 재우고 돌보며 무한한 사랑을 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돌보고 사랑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여성들, 가여운 여성들, 우리 시대 한국의 슬프고 장한 어머니들, 위대한 여자들.
어머니, 그리고 선생님.
제 생각은 좀 달라요. 그건 아마도 어머니나 선생님 두 분 다 주부로 아내로 엄마로 살면서 지극정성으로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끼니를 챙기고 밥상을 차려서 그러신 거예요. 자신을 위해서는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으시니까. 혼자서는 혼자 있을 때는 나를 위한 밥을 드셔본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요. 절 위해서 밥을 차려요. 맞아요. 두 분이 말한 대로 저는 저 혼자밖에 없으니까요. 혼자 사니까요. 혼자니까 더욱 내가 날 잘 돌봐줘야죠. 그래서 저는 저를 잘 먹이고 잘 돌보고 싶어요. 비싼 걸 먹는 게 아니라요. 저한테 몸에 좋은 거 맛있는 걸 먹여주고 싶어요. 그게 제가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일로 바빠서 밖에서 도저히 시간이 없을 때는 못 하지만. 집에 있을 때는 혼자서도 잘 차려 먹습니다. 저를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저를 더 잘 돌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혼자일수록 더 잘 먹습니다. 그거 아세요? 혼자일수록 자신을 더 잘 챙겨야 해요. 두 분도 이제 다 혼자되셨으니 (홀로서기에 있어선 제가 두 분보다 선배일 수 있어요. ㅎㅎ) 이제는 제 말을 잘 들으셔야 해요.
자신을 사랑하는 첫걸음은 혼자서도 잘 먹고 자신을 잘 챙기고 스스로를 잘 돌보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밥상을 잘 차려 내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내게 제일 맛있는 밥상.
하나. 남이 차려주는 맛있는 밥상.
둘. 내가 날 위해 차리는 맛있는 밥상.
셋.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먹는 밥상.
지난주부터 콩비지를 풀어놓은 것 같은 하늘에 콩비지 닮은 구름을 바라보다가, 며칠 내내 콩비지 콩비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다가, 입에 콩비지, 콩비지를 달고 살다가 드디어 콩비지(실은 되비지)를 끓였다.
흰콩을 밤새 불려놓았다가 갈아서 비지를 만들어 놓는다, 라면 좋았겠지만 게을러터 진 내가 손 많이 가는 짓을 할 리 없으니 마트에서 유통 기간 임박한 포장 콩비지를 할인가로 팔길래 냉큼 집었다. 생콩을 불려 간 고소한 풍미에는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그럭저럭 되직한 콩비지를 즐길 수 있다.
먼저 돼지고기를 들기름에 달달 볶아야 하는데 냉장고에는 멸치 쪼가리 몇 개뿐. 과감히 생략하고 흰콩비지찌개를 하기로. 마지막 간은 새우젓으로 봐야 맛이 깔끔 시원한데 집에 새우젓도 없다. 강화도 갔을 때 어쩐지 새우젓이 눈이 밟히더라니. 궁여지책으로 실험정신 발휘.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멸치액젓을 조금 넣어봤는데. 우웩! 안 넣는 게 나았다. 그 맛이 아니다.
냉장고 냉장칸 구석에 홀로 얼어가고 있는 또 다른 찬밥을 겨우 발견. 냉장고가 찬밥통인지 원. 편의점에서 산 술안주 볶음김치를 재활용한다. 치즈를 녹여 올린 계란 김치볶음밥을 했다. 모차렐라 치즈면 좋았겠으나 당연히 없으니 밥 위에 체다 치즈 두 장 올려 전자레인지에 빙빙 돌린다. 거기에 천오백 원에 산 얼갈이배추와 상추를 상에 올린다. 특제 집된장에 찍어 쌈 싸 먹는 맛. 오!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