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록20
굴업도 낭개머리언덕에 텐트를 칠 때다. 공교롭게 텐트를 치는 1인 여행자들은 나 빼고는 모두 남성이었다. 근처에 텐트를 치는 청년과 말을 섞게 되었다. 그는 내 텐트와 날 번갈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캠핑고수이신가 봐요.
엥? 제가요? 뭘 보고요?
그냥 포스가. 짐이 너무 없어서. 그에 비하니 전 너무 럭셔린데요.
그 말에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하긴 살펴보니 그의 텐트는 2 3인용이라 널찍했고 타프도 해를 전부 가릴 만큼 컸고 편안한 캠핑의자와 테이블은 기본. 세워 놓는 사이드 랜턴에 휴대용 랜턴까지 조명도 여러 개. 그에 비해 난 1인용 텐트에 타프도 없고 의자는 소꿉놀이 수준. 테이블은 아예 없고 랜턴은 펜슬 플래시 하나.
캠핑 진짜 많이 오래 다니셨나 봐요.
아닌데요.
배낭이 무거우면 여기까지 올라올 자신이 없어서...
짐은 최대한 적게.... 가 모토라서요.
고수는커녕 오히려 어설퍼보이지 않나요?
청년은 내 텐트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이 브랜드! 하며 아는 체를 했다. 네. 맞아요. 검색해 보다가 가격이 부담 없길래 9만 원 정도 주고 샀어요. 청년은 신이 나서 자신의 텐트가 무슨 브랜드라 했는데 그게 뭔지 난 몰랐다. 사실 알 게 뭔가!
캠핑을 시작한 지 일 년쯤 넘었다는 그는 어떤 장비가 좋은지 물었다. 나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장비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보다 더 잘 아는 거 같은데요. 그러자 청년은 내가 가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 같다며 그러면 이런 이런 브랜드가 더 좋다고 했다. (그 브랜드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관심 없어하자 청년이 말을 얼버무렸다. 전 아직까지는...... 겨울 산행을 다닐 것도 아닌데... 또 새 텐트를 살 필요도 없고. 뭐 혼자 다닐 건데.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자 청년은 멋쩍은 듯 씩 웃었다.
청년이 날 캠핑고수라고 착각한 이유는
값비싼 텐트와 장비빨이 가득한 캠핑족들 사이에서
그들 중에서 내가 가장 값싸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장비로도 당당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캠핑 장비 텐트의 브랜드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마음먹었음 떠나는 게 먼저 아닌가. 나는 길 위에서 지낼 수 있는 최소한만 있으면 된다는 주의라서. 반면 캠핑을 하면서 바리바리 싸들고 자기 집 안방을 옮겨오는 사람도 있고 초호화 캠핑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장소가 야외일 뿐 내 눈에는 캠핑이 아니라 호캉스를 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은 캠핑도 열심히 공부하듯 떠나는 것 같다. 뭐든 모범생들처럼 착실히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준비한다. 게다가 남의 시선에 신경 쓰고 남과 저울질하는 한국인들의 버릇은 캠핑에서도 여전하다. 남의 텐트와 내 텐트를 비교하는 사람도 많다.
뭐든 비교하고 경쟁하려는 심리. 유치한 속물근성이다. 어느 브랜드의 얼마짜리 텐트인가에 따라 기가 죽고 기가 살다니. 유명한 고가 장비에 어깨가 올라가고 자신의 값싼 장비에 의기소침해지다니. 모순이다. 복잡 다난한 도시를 떠나 숨 막히는 인간관계를 벗어나 자연의 품으로, 자연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음을 느끼고 깨닫고 자연을 즐기고 사랑하려 떠난 캠핑이 아닌가. 실용적 목적 이외에 지나치게 외관에 집착하는 건 주객전도다. 애당초 왜 편안한 집을 떠나 길 위에서 사서 고생을 하기로 했는지 그 본질에 충실한다면.
불현듯 2019년 떠났던 아이슬란드 캠핑. 링로드에서 마주친 한 청년이 떠올랐다.
캠핑족들의 루트가 대개 비슷하다 보니 캠핑촌에 도착하면 스쳐 지나간 사람이라도 한 번씩은 또 마주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단출한 배낭에 모포 하나를 짊어지고 차도 없이 걸어서 여행하던 그이. 더러운 체크무늬 남방에 해진 바지. 청년은 오랫동안 길 위에서 지냈는지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각양각색의 텐트들 사이에 코딱지만 한 텐트를 하나치고 나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피워물던 그 청년.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나는 그에게서 자유를 보았다. 삶의 무게에 주저앉기 전에,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기 전에, 잃을까 봐 두려워하기 전에, 생을 온전히 몸으로 느끼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젊음이 선사하는 삶의 가벼움. 거칠 것 없는 자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