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서 201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어지럼증으로 처음 쓰러졌던 해다. '양성 돌발성 체위 현훈증'이라는 의학적 병명을 달고 일명 이석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지 2024년 올해로 딱 십 년이 되었다. 그 사이 서 너 차례 재발해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양성'이라는 말은 절대 죽지 않는다, 위급하지 않다는 의미다. 결국 암 같은 병으로 전이되기 전까지 이런 잡병 -고질병은 중병으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잠을 못 자고 잘 못 먹고 스트레스가 심하고 체력이 바닥나면 과로가 누적되어 한계치를 넘으면 어김없이 어지럼증이 찾아온다. 몸의 균형이 깨지고 문제가 있다는 걸 감지한 육신이 자동적으로 ON/OFF 스위치를 작동시키는 자정 작용 시스템, 건강을 지키려는 몸의 신호수, 몸이 집이라면 불이 난 집에 불을 끄려고 몸이 빨간 불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는 경고음인 셈.
아프다고 (남들에게) 미안하지는 않다.
다만 나 자신에게 미안할 뿐이다.
천 년 만 년 멀쩡히 살 줄 알고 무슨 짓을 해도 끄떡없을 줄 알고 자만한 내가.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지난날이.
타고난 대로 생긴 대로 체질 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뒤탈이 난다는 말이,
어릴 적엔 뭔 소린 줄 몰랐었는데.
병상에 눕고 나서야 병원을 들락거리고 나서야
병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성찰에 성찰을 거듭하고 나서야
내 앞에 놓인 삶이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은 나이불문 모두 노인이 된다.
병에 걸리면 우선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숨 쉬는 것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통증이요 고통이요 지옥이 된다.
그러므로 병마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 방법, 공존할 방식을 찾아야 한다.
질병과 함께 살기.
내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삶과 생 앞에 겸허해지기.
보나링에이정 맥페란정 기넥신에프정 가스모틴정 바스티남정 헤다크캡슐 마이드린캅셀.
처방전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수식 기호 또는 뜻 모를 암호만 같다.
내가 먹는 약 목록. 어지럼증 억제제. 구토 메스꺼움 억제제. 혈액 순환제. 일명 멀미약.
삼 주간 병치레를 했다. 근 몇 년간 연말은 항상 파티와 또 파티 아니면 한파를 피해 남쪽으로 훌쩍 배낭여행을 갔었다. 시끄럽고 흥분되고 정신없었던 연말. 올 겨울은 다르다. 아프니까 사람이 조용해지고 조심스러워진다. 작은 일에도 쉬이 피로해지고 짜증이 나서 실수할까 봐 부담될까 봐 사람 만나는 것도 저어해진다.
지난달 건강검진을 받았다. 역류성 식도염과 만성 위염이란다. 게다가 십수 년 전 수술한 말기 치주염. 강력한 주의를 요하니 대학병원에 가란다. 동네 치과에서는 치료 따위가 아예 불가능한 병이라 익히 알고 있는 대사.
것도 모자라 20일 새벽 극심한 어지럼증에 세상이 뒤집히는 아침을 맞다. 이러다 죽지 싶어 기어기어 전문병원에 갔다. 이석증이 의심된단다. 결국 뇌파 청력 근전도 검사 등등 정밀진단을 받았다. 진단이 나왔다. 병명 양성 돌발성 체위성 현훈증. 의심스러운 이석증 확증.
그러나 결론은 병으로 판명할 만큼 위험하지 않다고. 다만 뇌와 평형기관 사이 통합 시스템이 제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추정됨. 그러니까 뉴런과 시냅스와 전정기관 사이에 오작동 뭐 그런 거라는 말. 이유는 모른단다. 원, 인, 불, 명. 삼십 여 만원을 퍼붓어 검사한 결과가 원인불명. 그냥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고 무리하지 말라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들었다. 극심한 장경련이라는 고통에 내시경을 받았으나 장에 아무 이상 없다고 판명했을 때와 똑같다. 뭐 그런 것이다.
한의원을 두드렸다. 증상을 보더니 이런! 글쎄 '풍' 이란다. 머리에 풍이 든 거라고. 몸에 피가 잘 안 돌 때 쌓인 어혈- '담'이 몸 여기저기를 돌다가 머리로 가서 찬바람 맞으면 '풍'. 다행히도 이름대로 바람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며 위로하는 한의사. 무리하면 또 바람이 불고 잘 다스리면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런 것:
고질병 목록에 올해 어지럼증이 하나 더 추가되시겠다. 위통 복통 치통 편두통 요통 근육통. 지금까지 달고 산 통증의 목록들. 이쯤이면 온갖 고통에는 나도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예상을 항상 빗나가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 이럭저럭 도합 약 값으로만 팔십 여만 원이 깨졌다. 이 돈으로 비행기 타고 멀리 여행도 갔으련만. 아아. 어리석게도 사람은 한 치 제 앞 길조차 모르는 법이다.
어지럼증이라니까 다들 에이 빈혈 아니 냔다. 한의학적으로는 '풍'이라고 강조하니까 다들 웃는다.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쯧쯧. 네가 어렸을 적부터 막살아서 그런다. 약을 먹는 터라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약기운에 밤에 잠을 곤히 자니 몸무게도 늘고 혈색만 좋아진다. 되려 정말 아픈 거 맞냐는 의심의 눈초리. 웃자고 일부러 걸린 꾀병 같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자니 뭘 해도 코미디가 된다. 허허실실 웃는다.
아침 식사 전 역류성 식도염 약 한 알을 먹는다. 그리고 또 아침용 만성위염 약을 먹는다. 다음으로 식후에 아침용 어지럼증 약을 먹고 저녁 식사 전에 위염약을 그 후에는 어지럼증 약을 먹는다. 모처럼 균형 잡힌 식단에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있다.
어지럼증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몸. 아침마다 목과 어깨가 뻐근하다. 심지어 허리마저 시근거린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누웠다 일어설 때마다 엄습하는 어지럼증에 대비해 뼈 마디마디와 힘줄 하나하나가 긴장하는 탓이다. 병과 의심과 나 자신에 대한 불신. 그런 내 정신에 저항하는 육신의 반란. 이런 모든 것들과 함께 혼자서 나 자신을 끌어안고 보냈던 연말.
육신의 고통이 찾아올 때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아이러니. 깨어있음의 고통이라니. 고통의 순간에 명료해지는 의식이라니. 나 몸이 고통 속에서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 되찾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우리는 너무 높고 너무 강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좁은 한계를 초월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 밖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 몸이 없이는 아아, 나도 없는 것이다.
육신의 고통은 자신의 내면에 고도로 집중하게 한다. 고통의 순간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오롯이 자각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내면 속에는 언제나 아주 미세하고 절망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래서 질병을 사고나 일시적인 시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 잔인하게 말한다면 - 일종의 소명으로, 또는 질병에 적응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병이 낫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이 낯선 상황에 대해 명철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이 된 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를 느끼고 고통을 견뎌 나갈 힘을 찾아야 할 때 바로 그때가 되어서야 고통을 통해서 깨우치는 것.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고통일지라도, 나는 변함없이 내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나는 아플 때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또 쓴다.
내 마음과 감정이 흐르는 곳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흔들리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을 명징한 언어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글을 쓰다 보면 그러면 걷잡을 수 없이 풍랑에 요동치는 감정이 어느새 졸졸졸 흐르는 한가로운 시냇물로 변해 있다.
글을 쓰면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집요하게 직시하면서 자신이 겪는 불운과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글을 쓰면 통증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이야기이며 질병은 더 이상 불운이 아니라 내 몸이 보낸 친구가 된다.
질병이란 자신이 먹고 마시고 살아온 이야기가 몸에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질병은 고로 나의 역사.
그러므로 나는 글을 쓰면서 병을 읽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비 없는 생이 준 불행에 무방비로 던져졌을 때
그 모든 불운에 맞서는 최선의 방책,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최고의 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