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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ngtake Jan 19. 2023

회사와 한통속일지도 모를, 고충상담원

나는 오랫동안 여성단체에서 피해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일을 해왔다. 피해자는 여러 기관들 중 집에서 가깝거나 혹은 멀거나, 여러 정보를 통해 단체를 선택했고 상담자와 상담을 했다. 단체는 피해자 본인과 이해관계가 없다. 상담자는 피해자가 주는 정보만을 받을 수 있고, 피해자가 원했다가 원하지 않을 경우 상담은 바로 종료된다. 피해자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직장 내에서 발생한 성희롱∙성폭력 사건의 경우도 외부 단체에 먼저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내가 일하는 이곳도 외부에서 일할 때 피해자들의 전화를 받곤 했다.      


나는 이 기관에서 처음 피해자들을 만나 조금 놀라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나는 그간 피해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 속에서 꾀나 잘 상담하고 지원하는 활동가라 자부해 왔다. 그다지 증명하지 않았어도 피해자와 상담자의 신뢰는 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부분이 컸고, 상담과 지원의 과정 속에서 대부분 우리는 서로 고마워하고 지지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곳은 아니었다. 애초에 상담하는 사람을 전면 믿기 어려운 구조다. 나는 처음 일하며 피해자에게 최대한 에둘러 설명했는데 결국은, 저는 비정규직이고, 외부에서 왔고, 그 말은 소문을 나눌 동기나 선∙후배 인맥이 별도로 없다는 뜻임을 강조했다. 상담을 하고 조사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그 신뢰는 켜켜이 쌓지만, 쌓이는 듯했던 신뢰는 갖가지 소문이 피해자 귀에 들어가고, 불안이 고조되면 ‘상담자인 네가 소문을 낸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을 조심스레 들어야 했다.    

  

나도 안다.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나는 회사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속한 같은 사장에게 월급을 받는 사람이고, 내가 아니라도 우리 부서에는 사람이 여럿이 있으며, 내가 그 정보를 단속하거나 알만큼의 재량도 권한도 없음을 안다. 다만, 피해자가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씨는 다를 줄 알았는데... 회사랑 한통속이었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굴이 붉어졌다. 말하고 싶었다. 아니라고요. 내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 회사가 겁나 성희롱인데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요. 성실하게 조사했고, 정말 감수성 있는 괜찮은 전문가들이 심의를 했는데 그런 거라고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이미 소용없는 말들이라는 것을 나는 피해자의 표정을 보면서 알았다. 권력에 기대어 혹은 무력하게 전문가인척 하더니 제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무지렁이를 보는 그 표정에 나는 붉어지는 얼굴이 조금만 더 천천히 붉어지길 바랐다.      


그 사건에서 나는 상담자로 지원자로 결국은 실패한 것임을 알았다. 피해자는 사건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형량이나 징계는 대부분 피해자의 기대를 밑돌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떻더라도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마음이 나아지는 부분이 있으면, 피해자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팠다. “이제 가해자가 징계가 얼마가 나오든 중요하지 않아요. 회사가 이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오래 진술을 충분히 잘 들어준 것만으로 저는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피해자가 있으니 말이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후회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았던 결과라 더 잘 설명하고 싶었고, 그래서 더더욱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내 맘이 편하고자 한 일이었지 않았을까 싶었다. 피해자를 보지 않고 목소리 너머를 감당할 자신이 내겐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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