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5화. 소용돌이

소설 '안아주세요' ㅣ 화이

by 한공기
화이 프로필.jpg 땅고댄서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photo (2).jpg 그림: 화이

창밖은 온통 노란색이었다. 은행잎이 노란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길을 따라 사람들은 분주하게 걷고 있었지만, 아직 5시밖에 안 된 토요일 오후의 가을 햇살이 길게 그림자를 비추며 내리쬐는 풍경은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카페는 아담했다. 오렌지빛이 섞인 붉은 벽돌건물 옆으로 난 입구에는 녹색 차양이 있는 야외 테라스가 있고, 청록색 나무 패널이 차분한 느낌을 주는 카페였다. 바 앞에는 로스팅 기계가 보이고 메뉴에는 갖가지 종류의 드립 커피가 소개되어 있다. 희선과 줄리앙은 그 건물 5층에 있는 땅고 아카데미의 수업을 막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아카데미의 첫인상은 깔끔하고 예뻤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활짝 열린 아이보리색 철문이보였다.갈색 가죽 소파와 의자들이 놓여 있는 공간을 지나니 흰색 나무문이 하나 더 달려 있다. 문에 있는 유리창에는 레이스 커튼이 붙어 있어서 내부가 들여다보였다. 문을 열자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왔다. 꽤 높은 천정에는 단아해 보이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벽에도 비슷한 느낌의 등이 군데군데 붙어 있다. 천정에 달린 팬이 천천히 돌아가면서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초콜릿 색의 마루는 반질반질 윤이 나고, 옅은 감귤 색이 칠해진 벽 한가운데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Pablo & Rosalina Tango Studio 라고 화려한 필체로 쓰여 있다. 반대쪽 벽은 완전히 거울로 되어 있었다. 가을 햇살이 파고드는 유리창에는 회색의 다마스 무늬가 있는 검은색 커튼이 반쯤 닫힌채 묶여 있었다. 플로어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거울 쪽만 빼고 빙 둘러 놓여 있다.


수업에는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로살리나는 공연 때 보던 것보다 훨씬 체구가 작았다. 몸에 붙는 와인색 상의를 입고 폭이 그리 넓지 않은 꽃무늬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등록을 받으면서 상냥하게 웃었다. 파블로는 스튜디오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서 수업에 쓸 음악을 고르고 있었는데, 공연 때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가 오늘은 부스스했다. 희선은 그들이 생각보다 수수하고 평범해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여자들이 피봇을 스스로 하지 말고 남자가 리드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남자는 여자의 골반 움직임을 머릿속에 연상하면서 리드 하세요. 여자의 골반이 그렇게 조그맣지 않아요. 커다란 힙을 상상하면서 크고 천천히 돌려줘야 해요."


오늘의 주제는 오초라는 동작이었다. 오초는 스페인어로 숫자 8이라는 뜻인데, 여자의 움직임이 숫자8자를 닮았다고 해서 오초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찌 보면 영원을 뜻하는인피니티(Infinity) 모양같기도 한데 왜 하필 숫자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여자가 한발로 중심을 잡고 서 있으면 남자가 여자의 골반이 90도 각도가 될 때까지 돌려준다. 그리고 같이 한 발 이동하고 또 반대쪽으로 돌려준다. 솔직히 한 발로 서서 남자가 돌려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피봇을 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희선은 생각했다. 남자도 여자가 스스로 피봇을 하면 훨씬 힘도 덜 들고 좋지 않을까?


"혼자 돌면 안 돼요. 그렇게 하면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리더가 상황을 다 컨트롤 하도록 맡겨야 해요."


희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로살리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녀는 희선을 직접 리드를 하면서 지도해 주었다.


"지금 한 것처럼 한 발로 잘 서 있으려는 의지만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면 남자가 무겁지 않을까요?"


희선이 물었다.


"여자가 중심축만 잘 잡고 있으면 가볍게 돌아가니 걱정하지 말아요. 버티는 게 아니라 남자가 돌리기 쉬운 상태를 만들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녀는 수업 시간에 여자들의 역할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춤을 추는 것과 알아서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리더인 남자가 일을 하게 두세요. 남자의 일을 여자가 미리 알아서 해 버리면 남자가 할 일이 없어져요. 그건 남자를 남자이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숙녀로서 존중하고 배려하도록 해 줘야 해요."


카페에 내려와서 테이블에 앉으려고 할 때, 줄리앙이 의자를 빼주면서 말했다.


"숙녀를 배려하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잖아요."


희선은 줄리앙이 빼 준 의자에 앉으면서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것 같아 낯이 뜨거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영화에서 남자가 의자를 빼 주던 게 이런 기분이구나. 이 사람은 학습력이 빠른 걸까, 혹시 바람둥이라서 그런 걸까. 에이, 설마….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오늘따라 구름도 없고 새파란 하늘이랑 금빛 나는 가을 햇살이라니, 캔버스에 담아놓고 두고두고 보고 싶네요."


"어머, 그림 그리세요?"


희선이 물었다. 줄리앙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그림 전공 했었는데, 포기한 지 오래됐어요. 졸업하고 그만뒀으니까요."


"왜 포기했는데요?"


"돈이 안 돼서요. 하하하. 재능도 없었구...."


그림 그리는 게 좋아 미술을 선택했지만, 군대를 갔다 와서는 2년간의 공백의 벽을 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현실과 타협해 버린 거였다. 순수 미술은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야 지속할 수 있는데, 그렇게까지 집에 손 벌릴 만큼 스스로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아서 졸업 후 평범한 직장에 취직했다고 한다. 그의 눈은 창밖 은행잎이 소복이 쌓인 길 위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선은 그의 미소가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마음속의 캔버스에 이미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미술 시험 보면 꼭 석고상 뎃셍 하잖아요? 제 닉네임이 바로 그 줄리앙이에요. 목 이렇게 빼고 있는.... 본적 있죠? 아그립빠, 비너스, 줄리앙...."


"아, 그 줄리앙이었어요? 전 스탕달의 적과 흑에나오는 줄리앙인 줄 알았는데..."


"적과 흑이요? 아.... 하하하"


희선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전 사실 어렸을 때 소설가가 되고 싶었더랬어요.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너무 좋아해서 학교도 국문과를 갔는데, 졸업하고 바로 소설가로 데뷔가 되나요? 글 쓴다고 집에만 있기도 눈치 보이고...그러다가 국가에서 지원하는 대학원 프로그램이 있길래 거기서 컴퓨터를 배웠어요. 이후에 운 좋게 취직이 됐고, 지금은 웹 디자인을 하고 있으니, 저도 제 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네요."


"지금이라도 다시 소설을 써 보지 그래요?"


"글쎄요, 이제는 자신이 없어요. 내가 글재주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줄리앙님이야말로 그림은 취미로 계속할 수 있지 않나요?"


"그게 마음처럼 안되더라구요. 좋아했던 일을 포기하고 나니까 저도 선뜻 다시 붓을 잡기가 두려운가 봐요. "


희선과 줄리앙은 어릴 때의 꿈과 멀어져 버린 안타까운 마음을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한숨을 내쉬며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풋 웃어 버렸다. 희선은 향기로운 커피 향도, 줄리앙과의 대화도, 아까의 수업도 모두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지난 꿈 같은 것은 바람에 구르는 은행잎에 묻혀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메시지의 알람이 울린 것은.


'잘 지냈어?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희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새벽별이었다. 강습 안내 메시지 말고는 처음 받아본 개인 메시지였다. 그와의 강습이 끝난 지 2주 만에, 지난 파티 이후 일주일 만에 온 연락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갑자기 생전 안 보내던 메시지를 보낸 거지? 시간이 있냐니, 무슨 의미일까?


'무슨 일이신데요?'


희선은 답장을 써 놓고 보내기를 누르려다가 너무 차갑고 사무적인 답장 같아 지웠다. 잘못 했다가 설레발을 떨고 싶지도,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망설이고 있는데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바쁘지 않으면 부탁할 게 좀 있는데 홍대 쪽으로 올 수 있을까?'


'괜찮아요. 언제요?'


'7시까지 괜찮아?'


시계를 보았다. 6시 10분. 희선은 벌떡 일어났다.


"저 그만 가야겠어요."


"무슨 일 있어요? 나쁜 일은 아니죠?"


"아뇨, 좀 급히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요. 미안해요."


"아녜요. 벌써 6시가 넘었네요. 깜깜해지기 전에 들어가야죠."


줄리앙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희선은 그의 표정까지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희선의 머릿속은 왜 새벽별이 메시지를 보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온갖 추측의 시나리오와 상황극으로 꽉 차 버렸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저녁의 홍대는 젊은이들의 열기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 네온사인이 켜지고 삼삼오오 혹은 커플로 꽉 찬 거리는 조급한 희선의 발걸음이 뚫고 지나가기에 너무 비좁고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희선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의 초침은 째깍째깍 무심하게 날아가 이미 7시를 15분이나 넘겨 버렸다. 골목끝의 코너를 돌자 카페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새벽별이 카페 앞 건널목에 서 있는 게 보였다. 희선은 미안한 마음이 커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새벽별은 희선을 발견하자마자 손목을 덥석 잡았다.


"늦었다."


짧은 한마디만 던져놓고 새벽별은 희선의 손을 잡아끌면서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희선은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그를 쫓아가야 했다. 그는 입을 꾹 닫은 채 굳어진 얼굴이었다. 희선은 한발짝 뒤를 따라 걸으면서 그저 새벽별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건널목을 건너서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소극장이었다. 극장 입구에 도착해서야 새벽별은 당황스러움과 두근거림에 숨을 헐떡이고 있는 희선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진짜 미안한 부탁인데, 오늘 하루만 그냥 내 여자친구인 척해줘. 내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께."


"네? 새별 쌉, 하지만...."


"어허. 오빠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희선은 얼떨떨한 기분만큼이나 귀가 얼얼해지는 음악 속에 파묻혔다. 빨갛고 노란 조명이 번갈아 켜지는 무대 위에 밴드가 록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이 쿵쿵 울릴 때마다 배 안쪽이 울렁거리면서 심장이 덩달아 쿵쿵 뛰었다. 의자가 없는 넓은 홀에는 수많은 사람이 몸을 흔들고 있었는데, 번쩍거리는 조명 사이로 보니 손에 칵테일이나 병맥주를 들고 있었다. 홀 반대쪽에는 바가 있고, 그 앞은 술이나 음료수를 사는 이들과 돌아다니면서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새벽별은 희선을 데리고 바 앞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벽 쪽에 붙어 있는 스툴 의자 위로 몇몇 사람들이 널브러지듯이 앉아 있었다. 새벽별의 친구들인 듯 보이는 무리들이 스텐딩 테이블에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별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반겼다. 새벽별은 그들과 웃으면서 어깨동무를 했다.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서로 소리를 질러야 대화할 수 있었다. 늘씬한 몸매의 섹시한 여자들은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는 얇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목과 귀, 팔에 주렁주렁 매달린 악세사리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새벽별이 희선을 소개했다. 네 커플이 한꺼번에 희선에게 말을 걸어왔다. 희선은 음악 소리 때문에 그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들도 희선에게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네 남자와 네 여자들은 새벽별과 이미 잘 아는 사이인 양 스스럼 없이 어깨나 팔을 잡으며 이야기를 했다. 희선은 그저 인형처럼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밝게 탈색을 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희선에게 큰소리로 무언가 물었다. 희선은 잘 알아듣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녀가 가까이 와서 희선의 귀에 대고 말했다.


"도대체 저 남자 어떻게 꼬신 거냐고?"


희선이 당황해서 쳐다보자 그 여자는 검은색으로 칠한 긴 손톱 끝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웃었다. 그녀의 귀 아래로 세 개의 커다란 링이 달랑거렸다.


"나는 그렇게 유혹해도 안 넘어오던데.... 자기 보기보다 능력 있다? 호호호"


그때 새벽별이 다가와 희선의 어깨를 감싸며 단발머리 여자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로 놀리지 마. 얘 순진하단 말이야. 너희랑 다르다고."


여자들은 새벽별에게 야유를 하듯 소리를 질렀고 남자들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누군가 잔들 돌렸다. 새벽별이 희선의 손등에 소금과 레몬즙을 얹어주었다. 다 같이 건배를 하고 원샷을 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손등을 핥았다. 희선은 반쯤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려다가 새벽별과 눈이 마주치고 나머지를 다 부어 넣었다. 얼굴을 찌푸리자 새벽별이 눈웃음을 보냈다. 희선도 손등을 핥았다. 시고 짭조름했다.


"자, 춤추러 가자!"


새벽별이 희선의 손을 잡았다. 친구들이 따라와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뒤엉켰다. 희선은 그룹의 중간에 엉거주춤하게 끼어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몸을 좌우로 흔들고 펄쩍펄쩍 뛰었다. 왼쪽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키가 엄청나게 컸다. 190은 족히 돼 보였다. 희선은 그의 겨드랑이에 머리가 낄 것 같아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본의 아니게 새벽별의 어깨에 기대는 형상이 되었다. 희선은 어쩐지 자신의 어깨를 안고 있는 새벽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고 느꼈다.


곡이 끝나고 새로운 곡이 시작되자 친구들은 어느덧 커플끼리 하나둘 흩어졌다. 희선과 새벽별 둘만 남자 새벽별이 희선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하하. 정신없지? 미안해. 오늘 모임에 파트너 대동 안 하면 벌칙으로 2차 쏘는 거였거든. 그 녀석들 마시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녀석들이라 미리 빠져나가야 해서 말이야. 괜찮지?"


희선은 잠시 새벽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나를 부른 거지요? 여자친구 없나요? 다른 여자 아니고 나한테 연락을 한 이유가 뭐죠?'


희선은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밖으로 내지 못했다. 대신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새벽별이 희선의 어깨를 두르고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희선은 저항하지 않고 그냥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처음엔 시끄럽게 들리던 음악이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흥이 나기 시작했다. 희선은 은근한 취기와 새벽별의 장난기 섞인 율동에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그렇게 몇 곡을 춤을 췄고, 데킬라를 몇 잔 더 마셨다. 빨갛고 노랗던 조명이 핑크빛으로 바뀌어 홀에 흘렀다. 새벽별이 희선의 허리를 안았다. 희선은 어정쩡하게 그의 품에안겨 블루스도 아니고 땅고도 아닌 춤을 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에 파티장에서만큼 긴장되지는 않았다. 희선은 새벽별의 어깨에 기댔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희선은 등의 솜털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이렇게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차는 너희끼리 가라. 나는 내일 일 때문에 술 못한다. 우리 먼저 간다. 전화해라."


새벽별은 친구들의 야유와 욕설을 뒤로하고 희선을 데리고 나왔다. 희선은 그곳을 빠져나온 이후에도 한참 동안 귀가 먹먹했다. 새벽별은 대리를 불렀다. 주차된 차 앞에서 대리기사를 기다리면서 새벽별이 말했다.


"오늘 고마워. 근데 혹시 기분 나쁘진 않았지? 희선이 아니었으면 곤란할 뻔했어. 내가 애인이 없다고 꼭 이렇게 나를 골탕먹이려 한다니까."


"아녜요. 저도 재미있었어요."


희선의 귀에는 애인이 없다는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희선의 미소를 보며 새벽별이 말했다.


"대신 약속대로 내일 맛있는 거 쏠께. 시간 있지?"


집에 돌아온 희선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었다. 데킬라의 취기가 아직 남아 있어서 둥둥 뜬 기분이었다. 왜 나였는지에 대한 물음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애인이 없고, 내일 우리는 데이트를 할 것이다. 뜨거운 물 온도를 맞추면서 희선은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채팅방의 알림이 떠 있었다. 미영이었다.


'너 다른 학원 다닌다는 게 사실이야?

그것도 줄리앙인가 그 사람이랑 다닌다며?

너 혹시 줄리앙이랑 사귀는 거야?'


희선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에 수건을 감아올리고 침대 위에 앉았다. 친구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희선은 미영에게 오늘 일을 어떻게 전할지 마음이 들떴다.


'아, 맞다. 너한테 아직 얘기 안 했구나. 줄리앙은 사귀는 거 아니야. 그냥 어쩌다 보니 같이 다니는 거야. 미리 얘기 안 해줘서 섭섭했쪄? 미안 미안....'


희선은 빨리 새벽별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희선이 새벽별과의 일을 적고 있는데 미영이의 답장이 왔다.


'그러게. 미리 알았으면 말렸을 텐데.'


희선은 메시지를 적던 손을 멈칫했다. 내용을 지우고 다시 적었다.


'뭘 말려? 줄리앙 말이야?'


'아니, 학원 말이야.

뭐 괜찮겠지. 한두 번 다녀 보는 건 상관없을 거야.

하지만, 되도록 가지 마. 댄서 할 것도 아니잖아.'


'무슨 뜻이야?'


'굳이 다른 데 가서까지 수업받을 게 뭐가 있어? 우리 동호회에도 중급 수업이 있는데.'


'하지만 그 선생님들 수업 좋던데?

여기서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더라구.'


'그래도.... 동호회 입장에서는 딴 데 가서 배운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니?

이제 겨우 적응하려고 하는 판에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고 여기 중급 수업이나 들어.

선배들하고도 친해져야지.'


'그럼 여기 동호회 수업도 듣고 거기 수업도 들으면 되잖아.'


'하.... 답답하네....

그건 네 생각이고.... 동호회 생각은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댄서 할 것도 아닌데 전문적인 수업 들어서 뭐 할거냐고. 충분히 춤 즐길 수 있는데, 너만 전문적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같이 놀 수 있겠니?'


희선은 예상치 못한 미영의 반응에 당혹감을 느꼈다. 이렇게 강경하게 희선의 생각과 충돌하는 미영은 처음이었다. 늘 희선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희선은 더 대화를 했다가는 감정이 상할 것 같아서 알았다고 하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미영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웠다. 전화기를 침대 구석에 집어 던지고 뒤로 벌렁 누워서 두 손으로 두 눈을 감쌌다. 어디에서 어긋난 것인지 되돌아보려고 애써봐도 희선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새벽별 이야기는 결국 한마디도 못 꺼냈다. 명치 있는 부분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밀려 올라오는데 메시지의 알림 소리가 들렸다. 새벽별인가?


'밤늦게 미안해요. 아무래도 아까 메시지 받고 어두운 표정이 걱정되어서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줄리앙이었다. 희선은 그의 자상한 마음 씀씀이가 고맙긴 했지만, 답장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영의'둘이 사귀는 거야?' 란 말도 신경이 쓰였다. 정작 메시지를 보냈으면 하는 이는 아무 소식이 없다.


희선은 여전히 침대 위에 누운 채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잠금화면의 시계의 숫자가 하나 올라가고 또 한 번 올라갈 때까지 쳐다보았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던 수건이 풀어져 젖은 머리에 침대 위 이불이 축축해졌다. 희선은 꼼짝 않고 누워서 시계의 숫자만 뚫어지라 쳐다봤다.


전화기를 들고 있던 팔이 아파 왔다. 희선은 그제야 팔을 떨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내일 3시에 데리러 오겠노라고 하던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희선은 그의 후미등의 빨간빛이 사라질 때까지 집 앞 골목에 서서 바라보았었다. 희선은 멀어져가던 그의 미소와 목덜미에 느껴지던 그의 숨결을 계속 반복해서 떠올렸다.


줄리앙은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보낸 메시지에 숫자 1이 사라졌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책상 위에 놓아둔 위스키 잔의 얼음이 녹으면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는 혼자서 조용히 위스키를 얼음에 녹여 조금씩 음미하며 야경을 바라보는 밤 시간을 사랑했다. 한 모금 넘기면 은은하게 목을 타고 입안에 퍼지는 몰트향을 즐겼다. 하지만 그 향기가 오늘은 감미로움보다는 지독한 외로움으로 그를 에워싼다.


검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야경 위로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녀는 참 어렵다. 남자답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문제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섣불리 다가가다가는 깨어질 것만 같았다. 줄리앙은 어릴 때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편안해 보이던 그녀의 미소가, 이어서 메시지를 받고 급격하게 굳어진 표정이 떠올랐다.


"나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줄리앙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아직 집에 오지 않은 걸까. 줄리앙은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남은 위스키를 한꺼번에 넘겼다. 오늘 밤은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배경음악: Remolino (소용돌이)


반항이란 걸모르고 살던 나의 열정은 당신에게 턱없이 부족하고


당신의 이름과나의 광기, 당신의 미소와 나의 괴로움이 소용돌이치며 내 삶을 힘들게 한다.


이 슬프고 외로운바람이 몰고 올 실패를 거부하고 싶지만


구원 없는 내운명은 다시 한 번 소용돌이치며 당신의 그림자 속에 갇히고 만다.


당신의 목소리, 다시 돌아와서 듣는 당신의 목소리....


작별하던 그순간으로 돌아가 왜 이리도 당신을 사랑하는지 묻는다.


만약 당신이원한다면,


더는 뛰지도, 꿈꾸지도 못하는 심장만을 남기리라.


당신의 목소리, 다시 돌아와서 듣는 당신의 목소리....


작별의 순간으로돌아가 왜 이리도 당신을 사랑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당신의 웃음과나의 원망, 당신의 미소와 나의 아픔,


그리고 당신에게다 바쳐버린 내 사랑....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봄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