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 Part II

날선 단편 ㅣ 김아소

by 한공기
KakaoTalk_20160210_162630761rebw.jpg 비목표지향적 프리터
난 이제 이 길을 걷는 게 처음처럼 신나지 않는데, 굳이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도 없는데, 이만큼 했으면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지 뭘, 그들은 목표지향적 인간, 난 되는 대로 사는 인간, 목표가 없으면 어때, 내가 이 길이 좋으면 그만큼 좋아하면 되는 거야.


작가 프로필 ㅣ 김아소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학창 시절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던 암기과목 성적은 언제나 중간 아래에서 허우적댔고, 못하는 걸 더 잘해보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다. 대신 흥미를 느끼는 종목은 그것이 운동이건 공부건 사진이건 혹은 (어쩌다!) 일이됐건, 항상 시작점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선 기량을 보였고, 선생님, 상사에게 잘한다 소리를 들었으며 뒤쳐져 있던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흥미 있던 몇몇 과목이 다행히 국영수여서 별 노력 없이 입시를 지나칠 수 있었고, 아직까지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헤어졌는 줄 알았다. 다음날 소희가 퀭한 얼굴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월요일부터 소맥을 들이붓고는 새벽 1시가 넘어 들어간데다, 오전에는 머리에 김 나게 기획안을 써다 바쳤는데, 그 프로젝트 진행을 이제껏 아무것도 안 한 옆 부서에서 맡게 되었다는 분통 터지는 소식을 오후 늦게 듣고 난 후여서, '야근은 너나 해라, 난 못한다'며 짐을 싸던 찰나 소희한테서 연락이 왔다. 고작 24시간 만에 만난 그녀였는데 그 사이 2년 4개월은 늙어있었다. 피부가 말라빠진 시래기처럼 푸석거렸고 다크서클은 광대 이남까지 영토확장에 성공해 있었다.


"너 뭔 일 있냐? 얼굴이 왜 이래, 하루 사이에?"


"나 있잖아, 미쳤나 봐. 아마 내가 너무 외롭고, 삶은 매일 똑같고, 예전의 나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치이면서 살고 있어서 말이야..."


얘기를 하면서도 소희는 반쯤 정신이 나가 보였다. 술을 먹을 게 아니라 약을 먹이고 재워야 하는 게 아닐까.


"뭔데?"


"...... 어제 너희랑 헤어지고 정환이가 집에 데려다줬어. 바람에 벚꽃잎이 날리고, 새하얀 카펫이 깔린 길을 걸었지. 우린 다 취했었잖아...."


"야, 설마 너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매일 하시던 말 기억나?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 뒤돌아보면 이 순간들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빛났을 거라던 말. 우린 그때 야유했을 거야. 입시에 짓눌린 끔찍한 삶이 가장 빛난다니. 아름다울 게 참 없다 그랬지. 선생님들은 너네가 어른이 되면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그랬는데, 그게 사실이었더라고. 너무 슬프지 않냐, 가장 빛날 때는 뭔지도 모르고 삶을 흘려보내다가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그 순간이 가장 빛났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거야. 한 번도 온전히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누려보지 못하는 거지. 그렇게 빛나던 순간들이 이제는 너무 멀어져서 잡으려 해 봤자 손가락 사이로 다 흩어져버려. 빛나던 그때의 나를 기억조차 못하는 거야. 그렇게 기계적으로 살아지고 있었구나, 나란 존재는. 그걸 어제 그 하얀 길 위에서 깨달았어."


"...... 그래서?"


"사실 동창 애들 만나서 '박소희 좋아하던 남자애들 많았지.' 하며 띄워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참 씁쓸했거든. 그때의 나에 비교하면 현재의 나는 남자친구도 없고, 연애도 잘 안되고, 나이 먹었다고 이젠 소개팅도 안 들어오잖아. 과거의 나에 비교당해서 상대적 박탈감만 커진달까. 그런데 정환이가 그때 내가 좋아했던 노래를 얘기했을 때, 10년 넘게 나를 기억하고 간직해 준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사실 좀 놀랐어. 정작 그걸 적어놓은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말이야."


난 목 안이 말라와서 안주를 집어 드는 것도 잊은 채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소희는.


"다행이었지."


'다행'이라고 말하며 소희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 웃는 그녀의 입매가 이상하게 쓸쓸해 보였다.


"뭐가?"


"어제 밤은 안 추웠잖아. 봄바람은 시원했고, 벚꽃잎은 머리 위로 쏟아지고.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서 밤새 이야기할 수 있는 날씨였어. 정환이는 언젠가 나를 만나면 꼭 그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고 했어.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해봤다고.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그렇게 오랜 시간 기억했다가 벚꽃비가 내리는 봄밤에 나만을 위해 불러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던 거야."


"...... 너 괜찮냐?"


소희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냐. 이젠 연애나 사랑은 포기해야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런 감정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오다가, 몇 년 만에 설레게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손끝도 댈 수가 없어. 왜 이제야 얘기했냐고, 왜 미리 찾아오지 않았냐고, 뭐 좋다고 그렇게 일찍 결혼했냐고 수없이 원망하게 되는데 괜찮을 리가. 하루 종일 그 애의 노래랑 말들이 머리에서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어. 나 미친 것 같아."


소희는 왼손바닥에 이마를 갖다 댔다. 테이블 조명에 그림자가 져서 그녀의 눈이 1미리는 더 안으로 꺼진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죽을 때까지 몰랐던 것보단 나을 거야."


정환이가 자기의 첫사랑을 그냥 무덤까지 가져갔으면 이런 번뇌는 없었을 거다. 소희는 그냥 그제와 같은 어제, 어제와 같은 오늘을 기계적으로 살아내고 있겠지. 다 타버려서 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심장에서 아직 타오를 뭔가가 남아있다는 걸 알려줬으니 그 얼마나 달콤한 번뇌란 말인가. 물론 그 달콤함은 거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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