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 Part I

날선 단편 ㅣ 김아소

by 한공기
KakaoTalk_20160210_162630761rebw.jpg 비목표지향적 프리터
난 이제 이 길을 걷는 게 처음처럼 신나지 않는데, 굳이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도 없는데, 이만큼 했으면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지 뭘, 그들은 목표지향적 인간, 난 되는 대로 사는 인간, 목표가 없으면 어때, 내가 이 길이 좋으면 그만큼 좋아하면 되는 거야.


작가 프로필 ㅣ 김아소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학창 시절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던 암기과목 성적은 언제나 중간 아래에서 허우적댔고, 못하는 걸 더 잘해보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다. 대신 흥미를 느끼는 종목은 그것이 운동이건 공부건 사진이건 혹은 (어쩌다!) 일이됐건, 항상 시작점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선 기량을 보였고, 선생님, 상사에게 잘한다 소리를 들었으며 뒤쳐져 있던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흥미 있던 몇몇 과목이 다행히 국영수여서 별 노력 없이 입시를 지나칠 수 있었고, 아직까지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며 살아가고 있다.






[뭐해?]


지치고 짜증나는 월요일 밤 9시 반, 빨리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가 쉴 생각으로 저녁밥도 걸렀지만 기획안은 당최 써지지 않고 있었고, 될 대로 돼라 내일 오전까지는 어떻게 되겠지 하며 포기하려던 찰나,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소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소희는 고등학교 때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도 잘했고, 남자애들한테 인기도 많았으며, 또래보다 성숙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그 시절 아이돌 빠순이인데다 하이틴 로맨스를 끼고 살던 나랑은 그래서 별로 친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졸업 후 십 년이 지나 나간 동창회 자리에서 아직까지 싱글인 사람은 그녀와 나 둘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 다른 녀석들이 배우자 얘기나 아이들 교육 문제로 열을 올리는 사이 우린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직장도 10분 거리에 있어서, 그 이후로 종종 퇴근 후에 만나 소맥과 와인에 지긋지긋한 직장 생활을 안주삼아 30대의 밤을 함께 보내곤 했다.


[어, 야근중 ㅠ]


[지금 경호 연락 왔는데, 이 근처에서 동창 남자애들 술 먹고 있다고... 혼자 가긴 뻘쭘한데 같이 갈래? 너 안 간다면 나도 굳이 안 가고.]


경호 이 자식은 매번 이런 식이다. 모이면 모인다고 미리 연락을 주던가, 술 신나게 먹다 생각나면 전화해서 나오라고 강짜를 부린다. 유부녀인 친구들은 밤에 불러낼 수 없으니 항상 만만한 소희 아니면 나다.


[뭔 월요일부터 술이야...]


[몰라, 걔 이번에 시카고로 발령 나서 담달에 떠난다고 모였나 봐.]


'핑계 좋네. 그놈 시키 와이프가 불쌍하다. 내 남편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쯔쯧.' 속으로 혀를 찼지만, 밥을 걸러서 출출하던 차였다.


[그럼 잠깐만 들를까? 누구누구 있대?]


[경호, 민준이 그리고 정환인가 다른 반이었던 애 하나.]


경호랑 민준이는 졸업하고 나서도 몇 번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정환이는 대충 얼굴이 기억날 듯 말듯 하다.


[그럼 뭐 잠깐 요기나 하고 가자.]


소희네 사무실 앞에서 만나 놈들이 있다는 근처 횟집에 들어섰다. '저기 있네. 어휴 아저씨들.' 밤 10시가 되어가는 시간이라 이미 둘은 얼굴이 벌겋다.


"웬 아저씨들밖에 없어서 잘못 찾아온 줄 알고 나갈뻔했다 야."


"어우 야 왜 인제 왔어~. 완전 기다린 거 알지?"


내 핀잔에 아랑곳 않고 경태 놈이 갖지 않은 애교를 부린다. '제발 그런 교태는 니 와이프랑 딸내미한테나 부리지?'


"모이면 모인다고 미리미리 연락 안 해 엉? 술 먹다 생각나서 밤늦게 연락한 주제에 기다리긴?"


"야야, 여기 회 완전 맛있어. 얼른 한잔 하자고?"


벌건 얼굴 경태는 소희와 날 자리에 끌어다 앉히고는 모인 멤버 소개를 시작했다.


"민준이는 알지? 여기는 정환이. 이과라서 같은 반인 적은 없긴 한데 기억 나나?"


"어, 기억나."


'아, 그 두 번째 벌건 얼굴이 정환이라고.' 난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고개를 끄덕끄덕과 도리도리의 어정쩡한 절반 정도로 휘젓고 있는데 소희는 기억이 나는가 보다. 역시 공부 잘했던 애는 기억력도 좋다. 그러니 사시도 패스하고 그러는 거지. 그런데 소희가 기억난다고 하니 정환이가 반색을 했다.


"진짜요? 나 알아요?"


이건 또 웬 존댓말이야. 아무리 고등학교 졸업하고 첨 만났대도 우리는 동창이건만, 이 어색한 존댓말을 대체 어째야 한단 말인가.


"어, 얼굴 보니 알겠는데?"


소희의 확인에 정환이의 벌건 얼굴이 어쩐지 더 불그죽죽해진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난 배나 채우련다. 뱃가죽이 척추와 맞닿을 지경이었으니까. 참치 뱃살을 와구와구 삼키는 사이 고등학교 때의 에피소드들이 줄줄이 나왔다. 야간 자율학습 땡땡이치다가 학주한테 걸려서 야자시간 내내 운동장 돌 고르던 얘기에서부터 학교 식당 영양사 누나랑 썸타던 얘기까지... 아니 이 인간들은 같은 얘기를 10년 넘게 하는데 안 지겨운 건가. 배도 어느 정도 채워졌겠다, 세 명의 유부남들도 이제 그만 와이프와 애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하려는데, 뜬금없이 고등학교 때 첫사랑 고백 타이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쩜 취향들도 그렇게 제각각인지 경호랑 민준이가 '지영이가 제일 예뻤지', '아니지 수현이가 짱이지'로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웃으며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던 소희와 내 얼굴에 짜증스러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자 경호는 갑자기 우리의 그 시절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야 그래도 우리 반에서 너네 인기가 장난 아니었잖아. 우리 담임이 막 남의 반 가서 우리 반에 팬클럽이 둘이나 있다고 자랑도 하고 그랬대."


"그랬지. 그래서 그 반 남자애들이 쉬는 시간에 우리 반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내려왔다가 우리 담임을 욕하고 돌아가고 그랬지."


"에이 아냐 아냐, 그래도 너네 마니아 층이 있었다니깐. 여깄잖아 산 증인."


경호는 정환이를 쳐다보며 눈을 찡긋했다. 그때까지 정환이는 별 말도 없이 소주만 들이키고 있었고, 눈까지 벌게져서 앞에 앉은 소희한테 '너 진짜 박소희야? 소희 맞아?'를 20분 간격으로 확인 중이었다.


경호의 눈짓에 정환은 앞에 있던 소주잔을 한 번에 비우고는, 이제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너 진짜 좋아했었어. 고등학교 때. 지금도 네가 내 앞에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


경호는 신나 보였고, 난 이건 또 뭐냐 싶었지만, 역시 오금고 퀸카 박소희는 뭐 이런 고백에 이골이 났는지 미소를 머금은 채 담담하게 물었다.


"너랑 같은 반이었던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좋아한 건데?"


"고 2 때 CA를 너희 반에서 했어. 영어 팝송반이었는데, 그때 수업 시작 전에 반 뒤에 붙여놓은 게시판에 학급 멤버들 소개가 있었거든. 그때 네가 좋아하는 노래에 적어 놓은 그 곡을 보고 나서야. 기억나? 네가 좋아하는 곡으로 적었던 그 노래?"


"... 아니, 기억 안 나. 내가 뭐라고 적었지?"


'소희도 인간 맞구나. 기억 못하는 것도 있네.'라고 생각하는 사이, 정환이는 천천히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월요일 밤 12시가 넘은 시간, 서초동의 횟집에는 다행히 우리뿐이긴 했지만, 30대가 되어서 술집에서 누군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는 건 정말 생경한 경험이었다.


"만일에 만일에 내가 너에게 고백한다면

들어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아요

만일에 만일에 내가 너에게 고백한다면

너무도 가슴이 아플 거라는 걸 알아요"


그리고 새벽 12시 반에 술에 취한 30대 아저씨가 부르는 낯선 노래가 그렇게 담백하게 가슴에 와 닿을 거라는 건 더더욱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순수함이라곤 없는 정... 그랬구나, 그때 내가 좋아했던 노래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네."


"우리의 어설펐던 첫사랑을 위하여!"


이미 만취상태인데다가 도무지 뭔지도 모를 노래를 듣고 있자니 정신이 멍해져 왔는지, 경호가 술잔을 들고 외쳤다. 그리고 경호의 다가올 시카고 생활을 축복하며 그날 밤 우리는 헤어졌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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