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공통주제 <봄> ㅣ 그레이 오렌지
즐거운 감정은 빨래가 마르듯 금방 날아가 버리고, 우울한 감성, 생각들은 언제나 침전하여 남아있음을 느낍니다. 우울함, 불안함, 슬픔, 좌절감에 예민하고 행복에 예민하지 못한 제 자신이 조금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지만, 아직까지는 수면 위 햇살보다는 우울한 바다 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어두운 것들이 가라앉아 있는 심해心海 속을 당분간 탐구하면서 글을 써 볼 예정입니다. 언젠가는, 나를 힘없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예민함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게로 자리를 옮겨가길 기대합니다.
그레이 오렌지 ㅣ 출판 디자이너
시각디자인 전공. 필살기는 출판 관련 디자인. 사진찍기와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함
시간 제약이 없는 수면 시간에 빠져 있다가 눈을 뜨니 방 안이 환하다. 매일 아침 눈을 떠보면 방 안은 햇살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내가 드러누워 있던 자리마저 탐이 났는지 나를 간질였다. 요즘의 나는 핸드폰의 알람이 아닌, 봄 햇살에 등을 떠밀려 하루를 시작한다.
시계를 봤다. 오전 10시.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지난날, 나는 오전 10시면 항상 회사 사무실의 책상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조급하게 작업을 할 준비를 하는,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 씁쓸한 커피를 마시면서 컴퓨터를 켜기 위해 얼마나 조급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해 달려왔던가. 오전의 몇 시간은 숨이 차도 멈출 수 없는 러닝머신 같았고, 이제 나는 그 버튼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영광스럽게도 따뜻한 햇볕이 가득한, 긍정의 기운이 샘솟는, 어감마저 포근한 ‘봄날’의 백수가 된 것이다. 여름날, 겨울날, 가을날도 아닌 봄날의 자유인. 봄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사표를 쓴 당찬 청년의 느낌이 내게서 묻어나는 것 같다.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일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방 안의 분위기를 바꾸고,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워크숍이 때마침 개강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강신청을 했다. 주말에만 갈 수 있었던 탁 트인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고 글이나 그림을 끄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몇 개월 후의 완성될 작업물을 상상하며 스케치를 하는 내 모습은 마치 ‘꿈이 가득한 시작’의 이미지를 몸소 표현하는, 퍼포먼스 예술처럼 느껴졌다.
늘 그렇듯이 시작은 설레는 일이었다. 어제까지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기 위한 준비. 새로운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대한 기대. 잠들기 직전부터 내일의 퇴근 시간을 바랬던, 구질하고 지긋했던 일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패턴을 일상으로 맞이할 준비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설렘은 곧, 마치 비 온 뒤의 꽃나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봄 내음 가득한 설렘과 희망은 누구에게나 관대했던 것만큼이나 꽃잎처럼 가볍고 펄럭였다. 아침 햇볕은 따가워졌고 결심은 계절을 타기 시작했다. 거리에 남아있던 꽃잎들은 행인들에 밟혀 점점 뭉개져 갔다. 봄옷을 입은 화려했던 나무는 수수해졌다.
사실은 수수해진 것이 먼저였다. 지갑 사정이 수수해질 즘 화려했던 봄꽃나무도 수수해진 듯 보였고, 날씨는 더워지고 설렘은 무뎌져 간 것이다. 새로운 패턴을 일상으로 맞이할 준비는 끝나버렸고, 새로운 일상이 정말로 찾아와버린 것에 실망하고는 약간 멍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가올 무더위는 어떻게 버티나 싶어서 말이다.
곧 봄이 가고 여름이 시작될 것이고, 사람들에게 한 철 사랑을 받았던, 꽃이 가득 폈던 나무는 시원한 가로수가 되어 길거리의 배경으로 칠해질 것이다. 지금의 설렘과 열정도 그렇게 변하지 않을까. 익숙한 어떤 것으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아니면 그저 평범한 배경인 것으로.
한껏 부풀어 오를 초록빛으로 만연할, 그 생명력을 한껏 뿜어낼 여름의 나무를 찬양하기도 전에 벌써 더위 생각에 질려 하고 있다니…, 준비중독자가 따로 없다.
봄과 여름의 길목에 놓여있다. 설렘은 한철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그 한철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중독자로서 살아왔다.
한낮 오후의 따뜻함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더위가 몰고 올 짜증과 나태함이 무서워 긴장한 채 나도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내년의 한철 설렘을 위한 또 하나의 지루한 준비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닌지.
반팔을 입어야 했던 더운 어느 봄날, 땀을 식히며 익숙한 카페에 앉아 다가올 계절들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