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공통주제 <봄> ㅣ 최미애
명상을 하면서 '관찰'이 취미가 되었어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촉감을 느끼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파악하는 관찰 작업을 수행하고, 그렇게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순간 순간 깨달을 수 있도록 뭔가를 좀 써봐야 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작가 프로필 ㅣ 최미애
IT 9년차 직장인.
불교와 명상에 관심이 많아 경전을 읽으며 '집중'과 '관찰' 수행을 하고있다.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세상에 관한 '관찰일기'를 쓰려한다.
야근을 하고 회사를 나서니 어둠이 짙게 내려 있었다. 늦었지만 월드컵 경기장에 딸린 공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집으로 걸어 갔다. 혹시나 고양이를 만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 날은 글러 먹은 듯 했다.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4월 밤의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나무들이 내리 누르는 밤의 그림자는 힘이 셌다. 점점이 놓인 가로등이 제 구실을 하기 어려울 만큼. 어둠이 촘촘이 메워진 길이 어쩐지 섭섭했다. 꽃을 죄다 떨군 벚나무들이 역광을 받아 요괴처럼 음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너는 형편없을 것이라고.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에 놓고 온 일들이 두서없이 머리를 휘감았다. 잘 못 만든 문서, 상사의 질문, 자기들끼리 마시고 온 커피, 돌아오는 주말에 회사에서 해야할 일들 같은 것이.
걷던 길을 벗어나 홍제천변으로 내려 가기로 했다. 평소에 가지 않던 내리막이었다. 몇 걸음 내딛으니 갑자기 봄 내음이 훅 끼친다. 엘리베이터에서 엇갈려 내린 여자가 남긴 향수 냄새 같았다. 무슨 향이었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라일락 향이었다. 어둠 때문에 실물은 보지 못했다. 꽃 향기는 코를 통해 눈 뒤쪽 어딘가의 감각 기관을 쿵쿵 두드렸다. 초등학교 때 간간히 줄넘기를 하던 동네 공원이 생각났다. 그 공원에도 라일락 나무가 몇 그루인가 있었다. 연보라색의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모양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그런 진한 향기를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내게 봄은 그 라일락의 향기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집 방향으로 가기 위해 개천 중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넜다. 밤이라도 돌은 크고 반듯했으며 물 수위도 낮아 별로 걱정할 것은 없었다. 삼분의 일 정도 건넜을 때였다. 물 속에서 무언가가 풀쩍하고 뛰어올라 깜짝 놀랐다. 내 팔뚝 두 개는 합쳐 놓은 듯한 커다란 물고기 였다. 이런 얕은 개천에 저렇게 큰 물고기가 있는게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는 그 녀석 하나가 아니었다. 다섯 마리, 아니 스무 마리쯤 되려나. 그들 모두는 밤의 정적을 깨드리며 첨벙 첨벙, 뛰쳐 올라 갔다. 나는 서둘러 징검다리를 마저 건넜다. 하류 방향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물고기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들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그들은 알고 있는 걸까.
계단을 올라 다시 개천변을 빠져 나왔다. 넓게 뚫린 도로에 가로등 불빛이 환했다. 아직도 귓가에는 첨벙이는 소리가 들린다. 둔중했던 꽃 내음도 아득하게 코 끝을 헤매고 있었다. 오랜만에 수고를 다한 두 다리는 가볍게 피로를 느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리 주변을 멤돌고 있던 생각들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구청 옆을 지날 때도 벚나무를 지나쳤다. 물론 꽃은 모두 지고 없었다. 그네들은 너무 빨리 꽃을 떨궈 버려서 미안한 듯 보였다. 괜찮아, 하고 생각했다.
괜찮아, 오늘 하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