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공통주제 <봄> ㅣ 변채림
대학 때는 일본어랑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교양으로 들었던 건축사가 너무 즐거워서 흔한 건물덕후가 되었습니다.
건축이라는 건 위대한 인류가 일궈나가는, 장대한 역사의 배경..일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건물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인간에게는 다른 어떤 예술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작가 프로필 ㅣ 변채림
해가 중천에 뜨면 나가서 맥주를 마시고 공원이나 도시에서 광합성을 하는 게 제일 좋아하는 일과입니다. 햇수로 5년 차 인스타그래머로, 글보다는 사진으로 일기를 씁니다. 호주 멜번으로 이사온지 10년이 좀 넘었고 작년 초에 호주 여권을 받았는데도 영어는 여전히 삶의 장애물입니다. 미래에는 소박하게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게 꿈인 것 같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고정관념을 나도 모르게 체화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요새 줄곧 과제 생각으로 바빴다. 생각으로 바빴다. 글을 쓰기보다 자료만 읽었다는 뜻이다. 침침한 실내에서 책장을 뒤적이다 봄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니 사고의 촛점이 맞질 않는 기분이다. 글쎄, 봄. 하면 생각나는 것들을 떠올려 봐도 신기한 소재가 없기에 봄이라는 막연한 단어에 내가 떠올리는 인상에 대해 적기로 했다.
일 년 중에 여름이 주는 기쁨을 최고로 좋아하기 때문에, 한 때 온라인 게임의 닉네임을 모조리 ‘여름주세요’로 통일했었다. 봄따윈 맹렬히 전사하고 여름이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애석하게도 주목을 받지 못하는 나의 봄은 금방 꽃가루 알레르기로 귀결된다. 2주에 만 원. 꼬박꼬박 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의 모든 구멍이 동시에 아픈 경험을 할 수 있다. 겨울 끝날 무렵부터 미친듯이 생식 세포를 뿌려대는 도시의 나무들을 보며 광란의 난교파티가 따로 없군 하고 생각한다. 봄이라는 단어에 괜히 심통을 부리는 게 아니다. 봄이 데려오는 화사하고 싱그러운 이미지를 일일히 상대해 주는 일이 귀찮다. 벚꽃엔딩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거기서 거기인 멜론차트의 봄타령들도 싫다. 늦겨울부터 초봄에 줄지어 있는 명절-졸업식-발렌타인데이-화이트데이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귀찮아하는 내가 꽃놀이에 참여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런 걸 매년 하러가는 친구들의 사진을 좋아요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봄이라는 한 글자에 꽉 찬 이런저런 활동들을 내 것처럼 즐기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꼬인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적어놓고 보니 내가 반사회적인 사람인 것 같다. 그렇지는 않다. 소박하고 정적인 삶에 충실하려는 일상 예찬론자는 더더욱 아니고. 오히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매일 즐겁고 새로운 이벤트가 있기를 바란다.
몇 번 강의를 들어보고 수강을 취소한 과목중에 '페스티벌'에 관한 수업이 있었다. 교수의 말에 따르면, 왁자지껄한 축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는 행위, 즉 명절이나 공휴일, 아니면 특정 시즌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사회적 이벤트들도 페스티벌의 일종이라고 했다. 이런 페스티벌은 공동체의 정신을 한 데 묶기위한 문명의 내재적인 특성이라는 게 수업의 논지였다. 이런 행위가 문명의 필수 요소인 이유를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남들과 같은 행위를 함으로 무의식적인 안정감을 찾고,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 구분지으며 일종의 만족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해석을 듣고 있자니 왜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사회적 이벤트에 충실히 참여하는지 자연스레 이해됐다. 마이너한 모임에 참가하는 것은 남들이 잘 안하는 일이니 특별한 감정을 얻을 수 있고 4월에 벚꽃엔딩을 듣고 꽃놀이에 참여하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재확인 받으며 소속감을 느낄 테니까, 라고 마치 내가 대중의 무리 안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멀리서 바라보며 얘기하는 나는 그렇다면 남들과 다르다는 특별한 기분을 누리기 위해 봄타령을 극혐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싫어하는 것은 봄타령 뿐만이 않는다. 평생 지겹도록 같은 레파토리인 캐롤도 싫다. 특정 시즌에는 이러한 감정을 가집니다, 라는 가이드라인에 맞춰주기가 귀찮아서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미술 수업처럼 ,“봄의 /따스함/을 /싱그러운/ 개나리로 표현해 봅시다” 같은 미묘하게 단정적인 테마를 암묵적으로 강요당하는 것 같아서 약간 배알이 꼬일 뿐이다.
봄에대한 이런 부정적인 인상은 단지 연달은 과제에 지친 뇌의 착각일 지도 모르겠다. 이듬 봄에도 물론 벚꽃엔딩은 안 듣겠지만, 꽃 보러 오길 잘했어... 인간은 역시 간사해... 하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생겨도 썩 좋을 것 같다. 알러지 약은 먹어야 하겠지만.